우선 일 년
우선 일 년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3.10.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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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한편으로는 덜 무겁고 한편으로는 더 무거운 마음이다. 결심하고 나니 좀 가벼워졌으나 그로 인해 닥쳐올 일들을 생각하면 또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추석을 보낸 뒤에 다시 인천 시누이댁으로 가시기로 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다. 어머니는 그냥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추석 전날 저녁 식탁에서 나눈 대화가 내내 마음에 걸리긴 했다. “니네 집에 있으면 안 되냐?”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자신이 없어요.” 그때 남편의 침울했던 표정도 기억난다. 사실 맏며느리도 아니고 내가 꼭 어머니를 모셔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신다. 고민이 깊어질밖에.

얼마 전에 어느 산문집에서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한 노인이 택시기사에게 바로 가면 20분 거리의 목적지를 시내를 통과해서 가자고 한다. 노인은 추억이 깃든 장소마다 멈춰 세우고 말없이 바라보곤 하면서 한참을 돌아 도착한 곳이 요양원이다. 요금은 안 내도 된다고 말하는 택시 기사에게, 생의 마지막 기쁜 순간들을 가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노인은 요양원 문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노인은 따뜻한 기억을 간직한 채 떠났을 거라며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내미는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앞으로 나도 그 택시 기사처럼 누구든 되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겠다 생각했었다. 하물며 어머니임에랴.

고민 끝에 남편에게 `우선 일 년만' 모셔보자고 했다. 다만, 나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 생각하고 있다. 매월 마감 맞춰 글을 써내야 하는 피 말리는 작업도 삶의 탄력이요, 독서 모임에서 어려운 책들을 필사하며 읽어나가는 일도 즐거운 고통이며, 내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편입할 계획도 세운 상태다. 또 학교에서 방과 후 민화를 가르치는 일, 맘이 맞는 사람들과 가끔 운동 나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혹시라도 이 모든 걸 놓아야 할까 봐 걱정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남편은 계속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겠다고 약속했다. 필요할 때 며칠씩은 다른 형제들도 당연히 도울 거라고도 했다. 결정은 끝냈는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런 내 결정에 대해 주변에선 큰 결심 했다고 응원하면서도 우려 섞인 걱정들이 대부분이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혹시 나중에 서로 상처받고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는 나에게 누군가 `현재 부재중' 하지 말라는 말을 해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소중한 현재를 비워두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래, 미리 걱정하지 말자. 생각만큼 힘들지 않을지도 몰라!

어머니 나이 올해로 망백(望百), 백 세를 희망하는 나이라지만 작년보다 확연히 약해진 모습에 불경스럽게도 근심이 앞선다. 이제껏 이름만 가족이었지 늘 `시어머니와 며느리' 만큼의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불필요한 틀에서 벗어나 같은 여자 입장으로 부담 없는 동거를 시작해볼까 한다. 여우가 어린 왕자 만나러 가듯 열여섯에 시집와서 7남매 키우느라 껍데기만 남은 한 여인의 삶에 귀 기울여 보리라. 어쩌면 영영 늦기 전에 진짜 가족이 되어볼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우선 일 년, 거창하진 않아도 소소하게 행복한 추억 몇 가지는 만들어 봐야겠다. 누가 알겠는가. 그러다 보면 `시(媤)'자 사라진 우리 사이에 끈적한 정이 차오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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