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대로 괜찮다
그런대로 괜찮다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승인 2023.10.1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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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어떤 자매를 알고 있다. 오래된 공원 입구에서 작은 찻집을 한다. 동생은 아침 8시에 나와서 손님을 받고 언니는 12시에 출근해 한창 바쁠 때 함께 일하고 동생은 2시쯤 퇴근한다. 언니는 오후 손님을 받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략 6시 넘으면 찻집을 닫는다. 이런 루틴은 1년에 363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다. 성실도 병이 된 것 같다. 자매가 생긴 건 다르지만 어찌나 기질이 닮았는지 1년에 이틀 외에 쉬어본 적도 없고, 쉬고 싶지도 않단다. 하루 문 닫고 집에서 쉬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어서 그다음부턴 그냥 몸이 아프지 않는 이상 문을 열고 손님에게 차를 판다. 공원에 사계절이 다 있고 자신들은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길고양이의 집사 노릇과 매일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는데 굳이 문을 닫아야 하냐고. 휴가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고 취미도 없다. 일 중심적이어서 눈만 뜨면 사무실에 나오길 즐기고 주말에도 간혹 나와서 혼자 논다. 그녀들을 보고 있으면 나를 보는 것 같아 정이 간다.

아네테 멜레세가 쓰고 그린 작품 <키오스크>의 주인공 올가도 우리와 비슷하다. 모든 것이 갖춰진 키오스크 안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다. 가끔 키오스크를 벗어나고 싶을 때면 여행 잡지를 읽는다. 석양이 황홀한 먼바다를 꿈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으로 일상을 살고 있고 그런 우리만의 루틴이 깨지는 것을 힘들어한다. 하지만 가끔 신의 선물처럼 혹은 저주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오고야 만다.

올가에게 가장 먼저 그런 일이 찾아온다. 키오스크 밖에 있던 신문뭉치를 들어 올리다가 그만 올가의 키오스크가 넘어져 버린다. 겨우 일어나 흩어진 물건을 주우려 하다 보니 키오스크를 들어 올려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잠깐 산책을 하기로 한 올가. 하지만 곧 물에 빠지게 되고 키오스크를 쓴 올가는 강을 지나고 흐르고 흘러 바다까지 가게 된다.

난 요즘 경험주의 매력에 빠져있다. 생각지도 않던 제주도 여행을 자주 하게 된다. 혼자 있기를 즐기는 내게 여러 명의 친구가 생기고 특별히 한번 만나고 지금은 절친이 된 사이가 있다. 숨쉬기 운동만 했던 내가 상당산성을 혼자서 다녀오기도 했다. 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도파민이 춤을 춘다. 안 하던 것을 하나하나 시도하며 느끼는 쾌감은 계획 속에 있는 아는 맛의 일상 못지않게 쾌락적이다.

올가도 그랬다. 자의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다시 새로운 환경에서 잘 살아내고 있었다. 키오스크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이제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키오스크로 변신을 했다.

저마다 버리지 못하는 나만의 키오스크가 있다. 기질이나 성격, 버릇 습관 등 하짐나 올가와 우리는 변함없이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 혹자는 키오스크를 벗어버리지 않은 올가를 보고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각자의 영혼에 새겨진 무늬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고 무늬를 변형시키고 자라게 하며 세상의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

가끔 원하지 않게 떠밀려갈 때가 있다. 그곳에서 삶의 고통으로 물집이 잡혀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시절을 잊지 못할 때가 있다. 뭐 꼭 행복해야 하나, 행복은 욕망이 충족되면 사라지기 시작하는 소멸성의 성격을 갖고 있다. 행복에 의지하지 않고 오늘이란 날에 현재 누리고 있는 것, 나에게 올 모든 것을 환대할 성실함이 필요하다. 올가도, 자매도, 나도 각자 자기만의 키오스크와 함께 하루를 연다. 그런대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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