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앞에 서면
벽 앞에 서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7.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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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섬, 떠올리는 순간 외롭다. 사람들과 고립되어 홀로 남아있는 호된 적적함이다. 세상의 파도에 너무 휩쓸릴 때면,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일 때면 그곳이 그리울 때가 있다. 가끔은 거기에 혼자 갇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섬이 궁금하여 찾은 마라도였다. 5월의 끝자락에 비를 뿌리는 날이었다.

이 섬은 배에서 바라본 풍광이 독특하다. 가까워지면서 정체가 드러나는 섬의 벽면에 집채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파도에 깎여 생긴 해식동굴과 투박한 절벽들이 이색적이다. 섬들이 다 그러하듯 낮과 밤이 다른 섬. 들끓던 여행객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면 고요하고 적막해지는 섬이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가파른 계단이 앞을 가로막는다. 더운 날씨에 반갑지 않은 장애물이다. 계단을 올라서야만 섬의 본모습을 만날 수 있다. 숨이 차고 다리도 아프다. 헐떡이는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눈에 들어오는 초원은 속이 시원스레 트인다. 펼쳐진 초록의 융탄자가 힘을 뺀 보상을 해주는 것 같다. 한 바퀴를 둘러보는 내내 탄성을 부른다. 여기저기에서의 혼성이 바람에 실린다.

되돌아가는 배 시간에 맞춰 선착장에 내려와 기다렸다. 다시 타고 나갈 배가 와서 섰고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마지막 손님은 보기에도 안타깝다. 건장한 청년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세 명이 들고 내리는 것이다. 꽤나 시간이 걸린다. 간신이 배에서 휠체어를 들고 내린 후 바닥에 놓은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앞에 놓인 계단과 마주했다. 그 벽에 망연자실한 모습이 역력하다. 생각지 않은 상황이었나 보다.

그들에게 얼마나 큰 장벽이었을까. 혼자서 오르기에도 힘든 계단을 휠체어를 들고 갈 생각에 막막했을 터이다. 정보를 미리 알아보고 왔으면 좋으련만, 혹여 사정을 알면서 감안하고 왔는지 모를 일이다.

섬이 가뭇하다. 아주 작아진 그들이 선착장에 그대로 있는 모습이 두 눈의 앵글에 잡힌다. 차마 엄두가 나질 않는 모양이다. 휠체어의 청년도 여행이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에 난감했을 그가 측은하다. 나라도 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 얼마나 미안했을지. 설레었던 여행이 엉망이 되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그래도 함께 온 분들이 좋은 사람들인 건 분명하다. 이런 상황은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일이 누구에게나 분명 모험일 테니 말이다. 그들이 계단을 극복하고 여행을 잘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는 아무 일 없이 술술 풀리던 호기로운 인생에도 복병이 찾아온다. 그제야 뒤도 돌아보고 반성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태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 더 질 좋은 삶으로 이끈다. 온 힘을 다해 기어올라 벽을 넘어서는 순간 새로운 나를 만난다. 강하고 성숙해진 자신을 말이다.

한 생이 피고 지기까지 수없이 벽을 만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깜깜한 암흑에 숨이 턱 막혔다. 두려움이 앞서 보기만 해도 높아 넘어설 용기가 나질 않았다. 벽을 타고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몇 번의 벽을 만나면서 망설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어야 함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제 나는 벽을 만날 때면 눈을 감는다. 그러면 슬며시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벽, 그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나는 알았다. 두꺼운 벽 너머에 진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더 빛나고 찬란한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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