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은 쉬워져야 한다
수능은 쉬워져야 한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3.06.1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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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몇년 전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취업한 젊은 여성이 학교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부딪치는 부조리와 보수적 관행을 극복해가는 일종의 분투기를 그렸다.

드라마에 여운을 남긴 대사가 있었다. “공부? 그건 학원에서 하는 것 아닌가?”.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의 성적을 놓고 토의를 하다 누군가 뱉은 말로 기억한다. 교사가 스스로를 부정한 도착적 발언이지만, 한편으론 대한민국 학교와 공교육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밝힌 말이기도 하다.

이 대사가 새삼 떠오른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교육부에 `쉬운 수능시험'을 주문했다는 소식을 듣고나서다. 대통령은 바로 수능을 5개월 앞둔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혼선을 안겼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교육부총리가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힌만큼 대통령의 소신은 분명해 보인다.

언론은 부정적 보도 일색이다. 수능의 예측가능성을 흔들어 대혼란을 초래할 터이고 특히 한 문제만 실수해도 당락에 큰 영향을 받는 상위권 학생들은 사교육에 더욱 매달리게 될 것이라는 논조였다. 뜨끔했는지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쉬운 시험을 강조한 게 아니라며 한발 물러섰다. `공정한 변별력을 갖추되 공교육에서 다루지않는 분야는 수능에서 배제하라는 것'이 대통령 의중의 핵심이라고 해명했다.

대통령의 주문이 다소 급작스러워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라는 지적은 맞다. 수능 난도를 낮춘다고 사교육 문제가 단박에 해결되겠느냐는 반론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공교육의 틀내에서 수능을 치르도록 하자는 대통령의 원론적 주장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영국 옥스포드대 졸업생들이 우리나라 영어 수능 시험지를 받고 진땀을 흘리다가 “대학의 영문학 전공자들이나 풀 문제”라며 집어던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수학 문제는 카이스트 출신 공학박사들도 쩔쩔매 국제학회에 참석한 와국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을 정도다. 국어 시험의 난도는 가히 해외토픽 수준이다. 최승호 시인은 자신의 시를 지문으로 한 모의고사 문제를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그는 기가 막혔던지 “이건 가르침이 아니라 `가래침`” 이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수험생들을 성적순으로 일렬로 세우기 위해 무리하게 변별력을 높인 문제를 출제하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수능이 쉬워지면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 뺑뺑이'를 돌며 고득점을 준비해온 수험생들은 낭패를 겪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절대다수 중하위권 수험생들이 보도듣도 못한 문제 앞에서 좌절을 맛볼 일도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OECD(국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청소년 행복지수 꼴찌, 자살률 1위를 수년째 고수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표 신문 `르몽드'는 한국교육의 실태를 보도하며 `한국의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규정했다. OECD의 부끄러운 통계는 르몽드의 진단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한 설문에서 중고생 80%가 학교를 전쟁터에 비유했다. 오직 줄세우기가 목적인 수능과 필사적인 경쟁이 낙오자를 양산하는 입시 문화를 고착시켰고, 아이들은 그 지옥도에서 신음하고 있다. 르몽드는 아이들의 신음에 귀를 틀어막은 `한국의 어른들이 세계에서 가장 비정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교육이 반영된 수능을 강조하자 반대자들은 급격한 변화가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보다 긴 안목으로 정교한 대책을 세우자'는 판에 박힌 훈수를 되풀이 한다.

진통과 혼란이 동반되지 않는 개혁은 없다. 정년과 연금 수령에 필요한 근로기간 연장을 골자로 연금개혁을 추진 중인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국민적 저항에 부닥쳐 퇴진 위기끼지 몰렸었다. 윤 대통령의 설득과 표현, 추진의 방식이 거칠긴 하지만 그의 수능관은 아이들을 생지옥에서 좀 더 견딜만한 연옥으로 탈출시키자는 자비의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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