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비와 당신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06.1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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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그런 사람이 있다. 우연히 마주한 어떤 상황들 속에 예상치 못하게 떠오르는 사람.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지만 한때는 온 마음을 다해 서로에게 진득한 시간을 선사했던 사람. 나에게도 있다. 서로 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고, 모른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하지만 내 생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치열했던 수험 시절에 저 멀리서 버팀목처럼 서 있던 한 선생님이 있었다. 투박한 외모와 강렬한 사투리, 무엇보다도 불의를 못 참고 나태함을 견디지 못해 가끔 수강생들에게 비수가 될 수 있는 말도 서슴없이 하던 그의 모습은 처음엔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의 강의를 계속해서 듣다 보니 그의 열정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과목 특성상 많은 것을 암기해야 하기에 수험생들이 하나라도 더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은 가끔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마치 모든 수강생이 자기 자식인 마냥, 이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걸 결코 선호하지 않는 나였지만, 차곡차곡 쌓인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수험 기간 내내 선생님의 말씀대로 코스를 밟았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가끔 온라인상에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사실 선생님과 나는 이렇다 할 사적관계는 전혀 없다. 그저 나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조금은 더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아쉬운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기억에서 잊혀 갔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선생님이 아주 오랜만에 떠올랐다. 지난 연휴, 아이들과 찾은 한 유원지에서 우연히 어떤 팀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보려고 한 건 아닌데,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아이들과 황급히 들어간 곳이 야외 공연장이었고 마침 공연이 시작하려고 했다. 누가 들어도 감탄할 만한 유창한 실력의 노래 몇 곡이 끝나고 남자가수가 본인을 정식으로 소개하기 위해 첫마디를 내뱉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몇 달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선생님의 바로 그 억양과 말투였다. 사실 그 지역 출신이면 다 가지고 있을 아주 평범하고도 당연한 사투리이지만 나에게는 남달랐다. 그 시절의 내 모습과 늘 화면으로 마주했던 선생님의 모습,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회가 닿아 얼굴을 마주했던 어느 날의 찰나와 같았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련한 마음으로 공연을 지켜보고 있는데 무대 위에서 남자가수가 관객들에게 신청곡이 있으면 말해도 좋다고 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내리는 비와 생각나는 선생님. 노래를 듣다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느라 꽤 힘들었지만 애써 손을 들었다. 그리고 공연장에 울려 퍼진 나의 신청곡. `비와 당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아 핸드폰으로 동명의 노래를 틀자, 운전하던 남편이 지나가는 말을 툭 던졌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많은가 봐.” “그럼, 엄청 많지”라고 장난스레 말했지만 딱히 비가 와서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느 오랜 시절의 절박했던 나와, 그 절박함을 잘 알아주었던 선생님과, 그리고 그날 내렸던 비가 있었을 뿐.

여전히 파이팅 넘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생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 보이던 그 남자가수의 무대가 계속해서 이어지길 소망한다. 그리고 내리는 비에 당신과 나의 인연이 어디선가 또다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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