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그 생태적 전회를 위해
추석, 그 생태적 전회를 위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2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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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오 희 진 회장 <환경과 생명 지키는 교사모임>

추석이 지났다. 다른 때보다 귀성길은 편안한 반면 최고로 혼잡한 추석 귀경의 모습을 TV는 보여주었다. 자동차가 추석의 풍경을 주도한지는 한참 되었다. 국도와 지방도의 경우 말고도 그 폐해랄까 평소 한가한 시골 농로와 마을공터는 이미 추석 성묘에 나선 도시의 차들로 붐빈다. 차는 사람의 편안함을 위해 마을은 물론 돌아간 조상의 무덤까지 쉬 접근하고자 산길까지 이른다. 그 탓에 시골길에 서툰 도시형 차가 일으킨 사고로 차량들이 거기 어울리지 않게 꼬리를 무는 일이 벌어진다. 추석날 나는 두 번이나 길 아닌 길에 빠진 차의 가족들을 돕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추석은 다른 명절보다 감사의 성격이 더한 날이라 기꺼운 마음에다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여럿이서 함께 좋은 일을 하게 된 것이 참으로 좋았다. 이렇듯 차에 의존하게 된 추석은 귀향의 명절이 되었지만, 본래 추석은 숲정이에서 시작한 사람의 삶터가 흘러내려 이룬 도시의 삶을 성찰하는 바깥의 원형질임을 배워야 한다.

추석은 우리의 고유명절로 '(한)가위'라 부른다. 한가위의 시작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때 새로 정한 6부를 두 편으로 나눠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음력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모여 길쌈을 밤늦도록 하였다. 한 달째 되는 8월 15일에 길쌈을 얼마나 했는지를 살펴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길쌈을 많이 한 편에 사례하였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오락을 하였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가배는 '가운데'라는 뜻이며, '갚는다'는 뜻도 있다하니 추석의 이름 뿐 아니라 그 취지로도 어울린다. 이 신라의 가배는 고려 시대에도 면면히 이어져 노래로 불려졌고, 그 뜻은 이랬다. '팔월 보름은 아! 한가윗날이건마는 님을 모시고 지내야 오늘이 뜻있는 한가윗날입니다. 아으 동동다리(동동)' 여기서 아무리 즐거운 명절이라도 사랑하는 이가 없으면 하나 즐겁지 않으며, 무의미하다는 뜻을 새기면 한가위를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시선이 오히려 현대적이다.

이는 어느덧 조선조에 들어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며,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는 추원보본의 의례로 그 만남을 변형하여 왔다. 그리하여 때로 무거운 이 조상제례는 근대적 삶과의 만남에서 물리적 전환이 필요했지만, 그럴수록 수구의 관성이 힘을 발휘하여 왔다. 이제 평등 명절을 지내자는 작은 울림이 뜻있는 가족의 실천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인간의 의례인 한가위가 본래 지닌 원형을 회복하고 역사적 변형 과정에서 내용의 제자리를 찾아내는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사실 추석을 지내기 위해 여름내 우거지고 무너진 조상의 무덤을 벌초, 성묘하고 제사지내는 일은 여러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무덤 주위를 정비하고 무덤의 풀을 깎는 것은 그러나 숲의 원리를 벗어나서 행해질 수 없다. '숲은 그 안의 종이 다양할수록, 그 다양한 종들이 공생과 협력의 관계를 만들어낼수록 그 숲의 면역성이 높아져서 건강하고 풍성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무덤도 그 안에서 보존되고 궁극에는 다시 흙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또한 부모를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귀신이 아니라 반드시 산 자를 향해 그 밥을 돌리는 향아설위를 실행해야 한다. 향아설위는 직접 신인합일과 천지만물이 내 몸에 갖추어 있는 이치를 밝힌 것이다.(해월) 이제 추석, 한가위도 한 살을 더 먹고 그만큼 성숙한 시대의 창조적 의례로 되려면 자연과 생명이 하나의 고리로 순환함을 깨치는 생태적 전회가 요구된다. 우리는 오래도록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그 나눔의 풍요를 기원해 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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