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1년
그후 1년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5.12.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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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심억수

12월이다. 한 장 남아있는 달력을 바라본다. 숫자 밑에는 만나야 할 사람과 장소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동안 소홀했든 사람과 고마웠든 사람을 만나 감사와 미안함을 전하기 위한 일정이다.

창밖을 본다. 한여름 등을 내어 주었던 크고 웅장한 느티나무가 잎 하나 없이 모두 벗었다. 온몸으로 찬바람을 안는다. 침묵하던 나목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는 듯 윙~하며 생명의 소리를 낸다. 헤아릴 수 없이 떨어져 나간 나뭇잎처럼 떠밀려 보낸 지난날이 밀물이 된다. 내 삶에 미련으로 남아 있는 시행착오의 날과 앞날의 희망이 교차한다.

이제 부질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앞만 보고 달렸다. 반복되는 일상과 무미건조한 직장생활에 그저 그렇게 보낸 지난날들이 아쉽다. 그동안 가족 위해 부르던 노래를 내 안에 음표로 그려놓고 나를 위한 노래를 불러본다. 퇴직과 함께 삶의 1막은 끝이 나고 박수 소리 멀어져 갔다. 하지만 쪼그려 앉아 눈높이 낮추고 다시 삶의 2막을 시작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 한둘 보인다. 너무 높이 보아서 보이지 않던 고개 숙인 사람을 본다. 너무 멀리 보아서 보이지 않던 나의 그림자도 본다. 다시 올 것 같지 않던 찬란한 봄마저 새롭게 잉태한다.

대부분 사람은 한 해를 보내며 다사다난했다고 한다. 나는 다사다난했다기보다 마음이 자유롭다. 틀에 박힌 직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늦잠을 자도 된다. 어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이 많다. 하고 싶은 것도 많다. 퇴직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답답하다는 친구를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문화융성 국가다. 주민센터, 복지회관, 도서관, 대학교 등 공공기관에서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시행되고 있다. 본인만 부지런하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청주는 365일 공연과 전시가 개최되는 문화 생명도시다. 차 한 잔의 여유로움만 있으면 된다. 누구나 천천히 문화를 누리는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그동안 직장에 충실하기 위해 할애하지 못했던 시간을 세미나와 회의참석에 사용한다. 느긋하게 공연과 전시를 관람하는 마음이 자유롭다. 퇴직 후 1년을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살아왔다. 마음 깊숙이 자리한 꿈과 희망을 되짚어 본다.

인생은 연습이 없다. 찬란한 봄을 태동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도 당당하게 자신을 가꾸는 나목을 본다.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목을 바라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나목처럼 마음을 비우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목을 닮으려 애써본다. 빈 가지의 나목을 보면서 쓸쓸한 느낌을 받는 사람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한해를 자기의 뜻대로 보낸 사람은 나목을 보면서 희망을 느낄 것이다. 한해를 아쉬움으로 보낸 사람은 쓸쓸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쓸쓸하게 다가오는 감정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퇴직 후 1년의 삶을 나름 건강하게 잘 보냈다. 앞으로 내 삶은 해마다 새로운 계획이나 각오보다는 한 해를 그냥 무탈하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한다. 자녀와 아내가 그 자리에서 제 할 일에 온 힘을 다하는 생활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을미년 얼마 남지 않은 날을 그동안 소홀했든 사람들과 고마웠던 사람들을 만나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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