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하다
김장을 하다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5.11.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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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드디어 끝냈다. 김치냉장고 가득 김치를 채우고 나니 마음은 곳간을 가득 채운 듯 든든하다.

앞으로 일년은 김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올해는 유난히 배추결이 단단했다. 가뭄이 심했던 탓이다. 배추의 단단한 결은 켜켜이 배춧속을 채우느라 애를 쓴 흔적일터였다. 그 애쓴 흔적이 고맙기만하여 김장을 하는 3일 내내 배추가 달착지근하지 않아도 고소하다고 익으면 맛있겠다고 칭찬 세례를 하며 배추를 만졌다. 마치 배추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해마다 김장철이 돌아오면 이미 마음은 절여진 배추처럼 늘어진다. 수백 포기되는 배추를 절이고 씻고 버무리는 일이 힘에 부쳐 지레 겁이 나기 때문이다. 다른 집은 이틀이면 끝낼 일을 워낙 여러 가족이 먹을 많은 양인지라 친정집 마당에서 3일을 꼬박 배추와 씨름을 한다.

첫날 소금물에 초벌 절임을 하고 많은 배추를 뒤집을 수도 없는 터라 둘째 날에 배추를 씻어 덜 절여진 곳에 소금을 살짝 뿌려 놓는다. 3일째 김치를 버무리는데 집집이 가져다 놓은 김치통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커다란 김치통이 있다. 우리집 통이다. 다른 통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큰 것이 무안해서 구석진 자리에 슬쩍 밀어 놓아도 눈에 띄어 들고나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

우리집에서 김치가 빠진 밥상은 생각할 수도 없다. 김칫국을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과 김치볶음밥 타령을 1년 내내 하는 막내딸과 김치찌개를 잘 먹는 큰아이 때문이다. 나 역시도 김치가 들어간 음식은 싫증을 내지 않는다. 김장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한테 김치만 먹고사느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들어도 김장을 하는 일이 아무리 버겁고 힘들어도 가족들이 1년 동안 먹을 양식이니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금방 버무린 풋내 나는 배추줄기를 하얀 쌀밥에 올려 먹는 맛을 남편은 무척 좋아한다. 다른 반찬은 필요없다. 김치 밑동만 잘라 손으로 쭉 찢어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며칠을 김치 풋내를 즐기다 잠시 김치 접시에 젓가락이 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김치가 발효를 시작하면서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김치가 익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김칫국 타령이다. 매번 김치만 넣고 끓이기가 싫증나면 김치에 콩나물을 섞기도 하고 무, 황태, 심지어 호박고지까지 돌아가며 곁들여 끓여낸다. 그러면 “역시 김칫국이 최고야.” 하며 한대접 뚝딱이다.

김치는 다른 어떤 재료와 함께 음식을 해도 밀어내는 법이 없어서 좋다. 소금물에 절여져도 그 결기를 지키고 매운 고춧가루와 양념에 버무려져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종류의 양념들을 겹겹이 속에 품어 삭이고 삭혀 깊은 맛을 내는 게 김치 아니던가. 풋내가 나면 나는 대로 맛을 내고 익으면 익어가는 만큼 맛을 내는 김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김치를 사람에 비교한다면 한없이 넓은 가슴을 가진 속정 깊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은 김치가 건강식품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건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김장을 할 때마다 힘들다고 여전히 투덜대지만 단 한번도 김치를 사 먹거나 김장을 거를 궁리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배추의 푸른 결기를 지키며 온갖 양념들을 품어 삭히는 그 시간들이 경이롭기도 하고 고마워서일 것이다.

올해도 투덜대며 김장을 담았지만 내 투덜거림조차도 김치는 버무려 삭혀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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