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재를 잡는 창조 괴물
영원한 현재를 잡는 창조 괴물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5.11.09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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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영숙

그가 왔다. 영원한 현재를 주장하는 철학자 강신주!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의 불굴의 혼을 들고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처럼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왔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게 한다.” 그가 두 시간 내내 강조한 주제는 영원한 현재에서 참된 나로 사는 길이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부화뇌동하는 노예가 되지 말고 물구나무 선 삶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의 괴물이 되라는 전언이다.

몇 해 전 우연히 강신주의 인문학 강의를 듣고 그가 쓴 몇 권의 철학서적을 탐독하였다. 그후 <사자는 짐을 지지 않는다>는 좌우명격 시를 쓰며 왜곡된 가치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지배 질서의 도덕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착실히 학습하는 사막의 낙타였다. 주어진 상황을 비판적 분석 없이 대체로 긍정하는 자동화된 노예, 그것이 지금까지 낙타 무릎으로 살아온 내 삶의 이력이다. 자신의 실존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이 거대한 세계를 읽고 대상을 시로써 묘사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 참으로 무지몽매했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라면 사원이 있고 우상숭배가 있다(니체). 그리고 반드시 짐꾼의 길을 걸어가는 낙타가 있다.

낙타로 사는 삶인가, 사자로 사는 삶인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시하는 주인과 노예의 도식이다. 우리를 자본의 노예로 가두고 낙타 의식으로 무릎 꿇게 하는 자본주의 도시는 또 하나의 사막이며 낙타로 길드는 파놉티콘이다. 화려한 물질주의에 감염된 도시에서 연못 물살을 타고 뛰어 넘는 것은 삼백예순날 인공심장을 할딱이는 냉장고의 엔진뿐이다.

장자(莊子)처럼 소요유(逍遙遊)하며 구만리를 날 수 있는 대붕의 자유는 오아시스의 유혹과 연못의 실상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대체로 자본이 제공하는 화려한 미끼에서 오롯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적어도 새끼를 낳은 어미라면 일정 시기 낙타로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제는 미끼를 받아먹는 연못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연못 또한 기존 도덕을 긍정하며 자동화된 삶을 학습하는 고체화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막과 연못이라는 공간을 자각하는 순간 사자처럼 정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이 강조한 자강(自强)과 니체가 강조한 초인(超人), 아모르 파티(Amor fat i), 키팅 선생이 제시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강신주 철학자가 강조한 괴물(怪物)은 모두 같은 맥락이다.

‘괴물’이라는 비유로 청중을 압도한 그가 우리에게 던진 괴물의 진정한 의미는 공장의 기성화처럼 규격화된 시류에 편승한 어정쩡한 부류가 아니라 완벽한 주체로서의 자아이며 자강, 초인, 창조적 인물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주인이고, 남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노예라는 공식. 물론 내게도 유익한 그 일이 타자에게도 유익한 일인지 진정한 지성이 따른다.

자본의 수레바퀴에서 잃어버린 정글의 자유를 찾으려면 짊어진 짐의 성격을 분석하고 사자처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늘 새로워지고자 하는 것, 끊임없이 자기 파괴를 통한 가치 창조 그것이 자강이고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창조적 괴물로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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