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에서
방앗간에서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5.11.02 17: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햇살이 좋다. 서둘러 고추자루를 차에 실고 친정으로 향했다. 눅눅해진 고추가 마음에 걸려 햇살 좋은날을 기다려 온 터였다. 아침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볕이 좋기를 기다렸지만 미세먼지를 듬뿍 품은 안개가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늘 햇살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인양 반갑다.

친정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고추를 널었다. 선홍빛 고추가 바람과 햇살을 받아서 그런지 더욱 선명하다. 며칠 전 문우에게 부탁해 가져온 고추를 남편과 함께 마른기침과 재채기를 해가며 꼭지를 따 놓았었다. 일년 식량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담기위해서 준비한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친정에서 농사지은 걸로 우리 집 밥상을 해결했지만 어머니가 연로하신데다 다치기까지 해서 올해부터는 내가 모든 걸 해결해야만 한다. 한참을 햇볕에 온몸을 내 맡긴 고추를 만져보았다. 달각 달각 고추씨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방앗간은 이미 마당 가득 고추자루들과 사람들이 섞여 순서를 기다리느라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그 틈에 끼어들어 나도 그네들과 같은 풍경이 된다. 마당을 둘러보았다. 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운 탓인지 사람들 말소리마저 기계소리를 닮아가는 듯 덩달아 목소리들이 커져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겨운 모습이다. 평상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순서를 기다리는데 “새댁은 어디서 왔수?”하고 옆에 앉은 할머니가 묻는다. 왜 그 말이 새댁이 아니고 ‘새닭’으로 들리는지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버렸다. 이제는 나도 새댁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휘 둘러보니 방앗간 마당 평상에 앉아계시는 분들이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연로하신 분들 뿐이다.

등이 굽거나 허리가 휘어지고 검버섯이 가득한 손등을 바라보려니 내 어머니를 바라보는 듯 아려온다. 올여름은 유난스럽게 가물고 무더웠는데 저 굽은 허리로 고추농사를 어찌 지었을까. 삼복더위 뙤약볕 아래 고추는 어찌 땄을지 아마도 여러 자식들 나눠줄 생각에 고단함은 잠시 긴 밭고랑 내려놓았으리라. 젊은 사람도 힘들어 피하고 싶은 그 일들을 오롯이 자식들을 위해 견디고 견디었을 것이다.

옆에 할머니는 돈 주고 사먹으면 된다고 힘들게 농사짓지 말라는 자식들 성화도 모른체했다고 했다. 어디 당신이 손수 농사지은 것만 하겠냐며 삭신이 허락하는 한 당신 손으로 농사를 짓겠단다. 힘드시잖아요. 했더니 “그게 부모 맴인겨”하신다. 영락없이 내 어머니의 모습이다.

결혼하고 25년을 어머니가 주신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어머니도 늘 삭신이 허락하는 한 모든 것을 다 하려 하셨고, 삭신이 허락하지 않는 요즘에도 다리를 절룩이며 자식들에게 손수 해주지 못해 애달아하신다. 오늘만 해도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마당에 자리를 내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고추를 널어주겠다며 한손으로 지팡이를 의지하고 마당을 서성이셨다. 그 모습이 속상해서 내가 해도 된다며 팩 쏘아붙이고 말았다.

자식들에게 더 해주지 못해서 애달아하는 내 어머니와 같은 다른 누군가의 어머니들이 시골 방앗간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다. 시끄러운 기계소리는 이미 노인들에게는 노래장단이 되어 그 가락에 은근슬쩍 자식자랑을 끼어넣기도 하고 다른 할머니는 손주들 자랑에 손짓 발짓 흉내를 해가며 어깨를 들썩인다. 나도 기꺼이 이 땅의 숭고한 어머니들에게 끼어들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춘다. 고향 방앗간에서는 새댁이어도 좋고 새닭이 되어도 행복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