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덕꽃, 울리다
더덕꽃, 울리다
  • 이은희 <수필가>
  • 승인 2015.10.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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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수필가>

드디어 울렸다.

온 집안에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얼마나 고대하던 종소리인가. 이 울림은 바람을 타고 멀리 사는 그대에게도 닿으리라. 소리의 진원지는 하늘 가까이 솟은 초고층 아파트 테라스. 그곳에 식물이 자랄 수 있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대의 얼굴이 떠오른다. 보란 듯 긍정의 꽃을 피운 나의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가득하다. 지금 바로 그대에게 인증사진을 전송하련다.

성덕대왕신종의 울림이 이만하랴. 신기의 울림을 듣고자 조석으로 공을 들인 것이 몇 날 며칠인가. 연일 내리 쐬는 불볕더위에 잎끝이 마르고 바람에 찢기는 상처도 입었다.

사는 곳이 ‘바람골’이라 온몸이 강바람에 갈기갈기 찢어질까 벽에 착 달라붙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으리라. 갖은 생채기와 고통을 이겨낸 대가이다. 아니 그와 내가 한마음으로 일궈낸 믿음의 꽃이다.

종소리의 장본인은 더덕꽃이다. 겉모습이 단아하기 그지없다. 바람이 슬쩍 스치기만 해도 좋은 소리가 울릴 듯하다.

큰 수술 하나에 작은 수술 다섯 개가 돌려나 있다. 겉모습은 연둣빛 종 모양에 속살은 자주 빛 점박이로, 끄트머리는 다섯 갈래로 약간 말아 올라간 듯 프릴 달린 자갈색 치마를 입은 듯하다. 지인은 꽃부리 끝 자갈색 빛깔이 고운 한복 저고리의 소매 끝동 같단다. 다른 이는 겉과 속이 다른 꽃이라고도 표현한다.

더덕 꽃을 톺아보면 참으로 오묘하다.

작은 꽃부리의 겉모양은 단순하나 꽃잎 무늬와 색감이 독특하다. 고 작은 꽃에 독특한 마력이 있다. 단순하다 못해 수수하고, 화려한 것 같으면서 애잔하다. 어찌 보면, 꽃잎 중심의 심지(수술)에선 흔들리지 않는 뚝심도 보인다. 강바람에 끄떡 않고 잘 버텨준 꽃이 대견하다.

덩굴줄기를 보고 그의 이름을 맞히는 이가 없다. 모두 시장 좌판이나 밥상에 오른 더덕 뿌리만을 탐한 것이다.

꽃 이름을 알려주자 입맛을 다시며 조만간에 더덕구이를 먹게 생겼다며 흥얼거린다. 하지만 나는 더덕 뿌리엔 전혀 관심이 없다. 종 모양의 더덕 꽃을 보고자 애정을 쏟은 것이다. 사람을 끄는 이상한 힘을 가진 야생의 더덕 꽃에 매료된 탓일까. 꽃 모양에서 생뚱맞게 산사에 풍경소리를 떠올린 것이다.

꽃의 생성을 줄곧 지켜보며 나의 상상력은 오로지 종소리에 닿아 있다.

“우리는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라고 어린 왕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덩굴줄기가 길게 뻗어 올라 꽃이 피어나길, 종의 울림을 고대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꽃의 전생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거대한 종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더덕을 애지중지 가꾸며 마음에 종소리를 키운 것이다. 드디어 자연이 수놓은 덩굴줄기에 종 모양 꽃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린다. 집안에 청아한 울림이 가득 퍼지리라. 그 울림으로 온갖 고통과 시름을 지우고, 덧없는 일상에 잠자던 감각과 의식을 일깨운다. 삶에 긍정의 꽃으로 향기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더덕꽃. 이제 고대하던 꽃이 피었으니 여러 날 은은한 종소리에 파묻혀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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