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속을 서성이다
가을속을 서성이다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10.1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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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출장을 갔다. 오랜만에 출장지에서 맞는 정시 퇴근이다. 뜨거운 가을 햇볕이 짱짱하게 쏟아진다. ‘인디언 썸머’가 이런 날씨일까?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끝에 찾아온다는 여름처럼 뜨거운 날. 뜨거운 햇살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한 여자의 시린 인생 중에 반짝 뜨거웠던 사랑, 그 아픈 사랑이 그려졌던 인디언 썸머 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터미널에서 갈 곳 몰라 서성이던 여주인공의 흔들리던 눈빛이 가슴으로 스며 들어왔다.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햇빛 빛나는 도시의 한낮은 나를 낯설게 했다.

요즘 나의 하루는 아침과 밤만 존재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을 했다. 오랜만에 낮이라는 시간 속에 덩그러니 들어서니 갑자기 갈 곳을 잃었다. 한참을 멍하니 핸들을 응시하다 차를 몰았다. 대청호 출렁이는 물빛을 보며 가을이 만발한 길을 달렸다. 한참을 익어가는 가을 속으로 질주했다. 상념에 젖어 달리다 보니 어느덧 신탄진이다. 네비를 찍어 거리 순으로 음식점을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바람이 사락사락 나뭇잎을 물들이며 차가운 밤기운을 몰아왔다. 대청호 목교에서 멈추었다. 목교 옆으로 벚나무가 일렬로 늘어서서 가을빛을 담고 수런거리고 있었다. 목교를 걸었다. 또각이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밤의 고요를 깨뜨리며 퍼진다. 밤바람 속을 걷다가 휘영청 들떠 있는 달빛 아래 벤치에 앉아본다. 흐르는 물이 가로등에 반사되어 은빛 조각들을 빛내고 있다. 내 인생의 남은 날 중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쎌카로 담아본다. 사십대의 가는 가을을 아쉽게 렌즈 안에 붙들어 본다. 계절에 취해 걷고 있는데 저쪽 가로등 아래 누군가 웅크린 모습이 보였다.

계단 옆에 쪼그려 앉아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에 차가운 밤바람을 예견한 듯 목도리를 둘둘 말고, 한 손으로 들면 폭삭 들릴 것 같은 야윈 몸으로 애절한 눈빛을 내게 던졌다.

걸음을 멈춰 섰다. 마른 나뭇잎처럼 가벼워 보이는 손에 절편을 들고 내게 내민다.

나는 마른 잎 같은 손에서 떡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다라를 들여다보았다. 팔리지 않은 떡들이 가을밤 달빛 아래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별로 떡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리의 음식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불결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주름진 얼굴과 애절한 눈빛에서 감지되는 아픔을 두고 갈 수 없었다. 모두 다 싸달라고 했다. 값을 지불하고 돌아서는 내게 그녀는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인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도 누군가의 아내였을 테고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지금의 나처럼 가는 계절을 아쉬워했을 푸른 날들이 있었으리라. 주름 가득한 얼굴도 꽃처럼 환했던 날들이 있었으리라.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얄팍하고 가벼워 보였던 손도 한때는 누군가의 얼굴을 따듯하게 매만져 주던 고운 손이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녀가 자꾸 떠오른다.

그녀의 얄팍한 손이, 가로등 아래 흔들리던 눈빛이 지워지지 않는다. 신이 선물한 짧은 기적 ‘인디언 썸머’처럼 그녀의 삶에도 따뜻한 날들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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