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주셔서 감사 합니다
태어나 주셔서 감사 합니다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5.06.0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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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엄마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생일 큰딸에게 받은 축하편지 내용의 한 구절이다. 자식이 제 어미에게 태어나 주셔서 감사하다니, 어찌 생각하면 가당치 않은 말이지만 자꾸 코끝이 시큰거린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쪽지 편지를 자주 이용했다. 그때마다 “엄마 딸로 이 세상에 와줘서 고마워”란 표현을 수시로 했었다. 어쩐지 그 답례인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니 바라만 보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느 날부터 나이 듦에 대하여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들은 지나간 세월이라 제쳐놓고라도 현재 내가 서 있는 자리,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내게 주어진 시간이 가늠이 되지 않을 때면 먼 산을 바라보고는 한다. 오늘도 딸아이의 편지를 읽으며 어느새 엄마를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무탈하게 자라준 것이 고맙고 대견해서 흐뭇해하다가 이내 습관처럼 내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몸이 성장하여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 중년을 거쳐 황혼으로 가는 것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이런저런 일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세상살이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일까. 어쩌면 나이 듦에 생각이 많아지는 이유는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나잇값을 제대로 하며 살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삶을 ‘살아간다’가 아닌 ‘살아낸다’라고 표현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동안 달음질치듯 정신없이 살아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생각할수록 씁쓸했다. 

겉으로는 힘들다는 내색 없이 씩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속으로는 곪아 터져 나왔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별것도 아닌 일에 과민 반응을 하는 것 같아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왜 나쁜 생각은 가지에 가지를 더해 무성하게 자라는지 급기야는 살아가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 사고에 빨간불이 켜졌다.

변화가 필요했다. 의식 전환을 위해 스스로 나에게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주어진 삶이니까 선택할 여지없이 수동적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자세로 내 몫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낸 의지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난 잘 살아온 것이고 잘 살아낸 것이다. 한동안 최면을 걸 듯 주문을 외웠더니 신기하게도 살아낸다는 표현이 좋아지고 그럴싸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큰아이 말대로 태어나서 감사할 만큼 잘 살아왔는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자신 있게 두아이에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냈다는 것이다. 큰딸은 이 어미가 있어 제가 태어날 수 있어 감사하다 했을 테지만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빌려 태어난 것은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고 축복 받은 신의 선택인 것이다. “엄마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준 딸아이의 편지를 나는 두고두고 펼쳐볼 것이다. 내가 살아낼 세상살이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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