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고 있는 거야
잘 가고 있는 거야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5.05.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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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이라는 푸른 달 오월에 두 번의 여행을 다녀왔다. 

초순에는 초등학교 여자 동창 4명이 중국의 황산과 삼청산을 다녀오고 중순에는 옛적 직장동료와 섬 여행을 다녀왔다. 늘 좇기 듯 종종거려야 하는 날들을 밀어놓고 등짝을 짓누르던 삶의 짐도 벗어 놓고 나 몰라라 떠났다. 

중국에선 황산의 장엄한 풍경보다 더 깊은 인생의 눈물과 아름다움을 보고 섬 여행에선 애잔한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았다. 

떠나는 날 아침에야 갈아입을 옷만 대충 챙긴 나와는 다르게 친구들은 아주 꼼꼼하게 준비를 해 왔다. 

간식거리와 함께 비상약도 골고루 챙겨온 덕분에 여행지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부터 몸살감기에 구토까지 하는 나는 그들의 약을 모조리 먹고도 비실거렸다. 빡빡한 일정 틈틈이 먹을 것을 건네주며 나이 들수록 건강이 제일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친구들을 보며 오히려 애잔해지기도 했다.

이젠 속내를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피곤해도 한방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지면 너나없이 힘들었던 과거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시울을 붉힌다. 나만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었구나, 어떻게 견뎠니!” 이야기 끝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참고 살기를 잘한 거라고, 아이들도 잘 커서 제 몫을 하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성공이라고. 숙연했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웃음소리가 커지게 한 건 건망증이었다. 

한 친구가 냉면이 아주 맛있는 집이 있다며 청주 가면 꼭 사준다고 한다.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물었다. 장소를 아주 정확하게 말하며 정말 맛있는 집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순간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그 집은 며칠 전 우리 넷이서 함께 갔던 집이었다. 친구는 우리와 함께 갔던 일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이어서 다른 친구가 조용하게 말을 한다.

“물 남았어?”

“왜, 모자라”

“물만 마셔버렸네” 웃음보가 다시 터졌다. 내일의 일정도 힘들 거라며 친구가 비타민 한 알씩을 나누어 줬다. 우리는 비타민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물을 따라준 그 친구는 약은 손에 놔두고 물만 홀짝 마셔버렸다. 찰나의 건망증이다. 소설보다도 생의 끈적한 연민이 함께 하는 순간이었다. 혼자라면 심각했겠지만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함께여서 큰 웃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푸름이 짙어졌다. 나뭇잎들은 햇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저 나무들도 한생을 살면서 잘리고 상처 입을 터이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사람도 그러하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던진 돌덩이마저 운명처럼 끌어안고 견디며 숱한 상처와 눈물을 삭혀왔다. 그 상처를 잘 익혀 이젠 향으로 그윽해지리라. 친구들, 우리는 삶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거야. 지난 삶에 비하면 그깟 건망증이야 별 것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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