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할 사람이 없다
말 할 사람이 없다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5.05.1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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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전시된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제목이 먼저 발목을 잡는다. 작가는 문학계의 원로 시인이다. 

‘내 인생 휘청거린 날/ 불현듯 불법(佛法)이 떠오른다/ 무너져 가는 삶의 짐/ 신심(信心)으로 붙들어 매면서/ 묵묵히 걸어 왔던 길/ 뒤돌아보면서 삼켜버렸다/ 문득 외로움이 달려온다/ 속 시원히 마음 털어 놓고/ 말할 사람이 없다/ 제기랄 두루뭉술 어물쩍거리는/ 짓눌린 빌어먹을 세상/ 이제 직관적 실체가 그립다/ 완벽한 사랑도/ 존재한다는 것도/ 욕망하는 법도/ 저 멀리 떠나버려진/ 봄으로 가는 길목/ 고독이 낮게 숨어 있었다.’ 김효동 시인의 「말할 사람이 없다」

외로움을 얘기하는 시인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속내를 털어 놓고 말 할 사람이 없다는 건 참으로 외로운 일이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다른 것 같았다. 하나 둘 삶의 짐을 내려놓으면서 마음을 비우지 않나 싶었다. 어쩌면 무거운 짐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은 아닐까하는 짧은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작품 앞에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용보다는 ‘말할 사람이 없다’는 제목이 더욱 걸렸다. 

다정하게 마주 앉아 말 할 사람이 없는 친정엄마의 투정도 외로움이란 걸 안다. 

‘밥맛이 없어 아무 것도 못 먹는다. 아프다. 우울증인가 보다.’ 다섯 자식과 손자들에게 전화해서 반복하는 말씀이다. 

작년 가을, 아버지가 떠나신 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두 번은 자식들이 돌아가며 모시고 외출을 한다. 아버지 산소에도 가고 싶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시고 간다. 수시로 집에 들려 살피고 전화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루만 지나면 투정을 하신다. 그렇다고 자식 집으로 옮기실 생각도 없으시다. 아버지와 함께 사시던 집에서 혼자 살다가 아버지 곁으로 가신단다. 그건 아버지의 당부이기도 했다. 엄마는 누군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없어짐으로써 삶에 대한 의지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의 날들이 짧다는 두려움도 내포되어 있을 터이다. 곁에 아무도 없으니 말하고 싶을 때 하지 못하는 서글픔을 자식들에게 하소연하고 있으나 남편 살아생전처럼 다 할 수가 없으니 그리움도 사무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절대 피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죽음과 세금, 그리고 외로움이란다. 외로움은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전화통화가 끝난 뒤, 믿었던 이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 심지어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불현듯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성공이나 체면, 사랑 같은 공식적인 동기들보다 삶에 더욱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외로움인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시나브로 떠나는 것을 실감할 나이쯤에 열정과 에너지마저 사라져 말할 사람조차 없다면 외로움은 밀물처럼 밀려오리라. 출구가 막혀버린 열정이 사그라져도 삶의 정점까지 속엣말을 다 털어놔도 되는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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