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5.05.1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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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노트북을 펼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주인의 손길이 어색한지 자꾸만 오타를 친다고 붉은 줄을 그어댄다. 별것이 다 사람 힘들게 한다고 투덜거려 보지만 어찌하랴. 그동안 지독한 독감과 싸우느라 소홀했던 내 탓인 것을 인내하며 다시 자판을 두드려 보지만 여전히 붉은 줄을 북 북 그어대는 통에 마음만 조급해질 뿐 속도가 붙질 않는다. 그래도 이 시간이 나는 행복하다.

그동안 감기에 점령당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백기를 흔들었다. 분명 백기를 흔들고 저항할 의지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투항을 했음에도 얼마나 지독한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 하나 빠트리지 않고 괴롭혔다.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감기는 내게 그 까짓것쯤으로 치부되어 왔다. 감기가 내 몸에 머물려고 하면 냉정하게 뿌리쳐 버리면 금방 가버리는 별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어렸을 때 냇가에 놀러 갔다가 물린 거머리만큼이나 끔찍했다.

큰 병원을 갔다. 의사는 일반 감기가 아닌 지독한 독감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 손에 타미플루라는 무기를 장착시켜 주었다. 신종무기인 타미플루의 위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십여 일만에 독감이 서서히 꼬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감하고 엎치락 뒤치락 싸우느라 온몸의 기운을 다 소진하고 나니 그동안 무심하게 흘려버린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평상시에는 한끼 정도 거르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그동안 감기가 나에게 별 것 아닌 그깟 것쯤으로 치부됐듯이 한끼 식사쯤이야 굶어도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독감과 싸우면서 그 대수롭지 않던 한끼 식사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하며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았다.

예전에 친정엄마가 모든 음식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고 했을 때도 귓등으로 들었다. 시간 맞춰 약을 드시기 위해 억지로 드실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도 심지어 물조차도 한약처럼 써서 제대로 넘길 수 없다고 하소연할 때도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몸이 아프시니 신경이 예민해져 음식 타박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 역시 감기를 앓는 동안 눈앞에 임금님 수랏상을 차려준대도 수저 들기를 거부했을 터였다. 제대로 먹을 수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수십일 동안 세상에서 가장 우매하고 나약한 인간의 표본이 되어버린 듯 우울했었다.

어제였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음식을 먹는 모습에 “아 맛있겠다”라며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날마다 흐리고 어둡기만 했던 하늘에 순간 쨍하고 햇살이 비춰 세상이 환해져 버린 기분이었다. 이젠 나도 맛을 느끼며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에 행복해졌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찌하랴. 그동안 별 것 아니었던 매 끼니의 밥을 제대로 음미하며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임을 이미 알아버렸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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