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
겨울 숲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3.12.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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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산책길의 겨울 숲에 눈이 내렸다. 나무와 길이 온통 하얀빛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들고 가지만 드러난 겨울나무 사이로 12월의 하늘을 본다. 소나무와 조릿대가 눈과 함께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주변은 온통 흰색인데 초록빛은 움트는 새순처럼 마음에 솟는 맑은 샘물 같다.

어느새 다 써버린 지난날들이 오솔길의 낙엽으로 수북하다. 사람들에게 짓밟혀도 아무 말이 없다. 눈길 닿는 단풍나무 가지에 홀씨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화려한 잎새들은 홀씨만 남긴 채 제 갈 길로 가버렸다. 서글픈 헤어짐과 함께 남겨진 홀씨는 겨울바람에 파르르 떨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고운 빛으로 입었던 옷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가야 할 길을 찾아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홀씨는 언젠가 땅에 떨어져 새싹으로 자랄 수 있기에.

숲은 나뭇잎으로 가득해 봄부터 가을까지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잎이진 그곳은 퇴색된 낙엽과 진한 갈색의 나무 둥지만 드러난다. 마치 세월을 더해가는 우리네 인생들처럼 겨울 숲은 그렇게 내 눈 안으로 들어온다. 그렇지만, 그곳을 찾아 난 그들과 정겨운 어울림을 갖는다. 매일 가는 곳이지만 자연이기에 싫증이 나지 않는다. 갈 때마다 시나브로 바뀌는 자연의 모습이 다정한 친구처럼 친해지고 정이 더해진다. 무채색의 겨울 숲과 사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나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말이 없는 숲과 어떻게 대화를 할까. 사람들은 참 궁금할 게다. 이상한 사람 아니냐.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산책길의 빈 의자에 앉아 눈 내린 겨울 숲을 바라본다. 숲 속으로 하나 둘 지난날들의 애잔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겹겹이 포개져 쌓였던 낙엽이 바람에 이는 것처럼.

오래전 여학교 시절 지금처럼 해 저무는 12월 겨울이었다.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 사회에 발걸음을 내딛기 전이었다. 눈보라를 바라보며 앞으로 내 인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람과 함께 내리는 눈은 아직 갈 길이 정해지지 않은 막막한 내 모습과도 같다고 생각되었다. 진학의 꿈도 가정 사정으로 접었고, 또 취업이 되어 갈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창가에 서 있으니 나도 모르게 두 볼에 눈물이 흘렀다. 시험장으로 떠난 옆 반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마음속으론 주어진 여건을 많이 원망도 했다.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막막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긴 시간 동안 눈보라는 연신 창밖으로 향한 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그 후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흐르던 서글픈 눈물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츰 가셔지고 새로운 삶의 길이 나를 인도했다. 사람의 인생길은 그 어느 누구도 말 할 수 없다. 주어진 길이 어떻게 연출될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마치 다 죽은 듯한 겨울 숲의 새봄이오면 초록빛 어린싹이 돋아나듯이. 숲을 보니 지난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기나긴 밤을 서글픔으로 채우며 부모를 원망하고 삶을 비관했던 철없던 시절이 왜 겨울 숲에서 살아날까.

퓌쉬킨의 ‘삶’이란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중략),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서러운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난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진다.’

겨울 숲에는 숨겨진 미래가 있다. 그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까. 현재가 너무 안 풀린다고 서러워하지 않겠다. 그 길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겨울 숲의 우둠지에서 까치가 운다.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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