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정(情)
  •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 승인 2013.08.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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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퇴임이 가까워 오며 회식 약속이 잦다.

지난 시간 함께 생활했던 동료들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모이는 것이라 나로서는 아주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냥 지나쳐 버려도 그만일 텐데…. 내가 근무했던 곳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찾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분주하게 지나간다.

이제 교단을 떠나는 나에게 옛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들이 나를 아리게 한다.

함께 근무하며 행사준비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한마음으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지냈기에 더 많은 정이 애틋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마음은 처음처럼 변함이 없다. 함께 모인 자리에 피어나는 웃음꽃은 순결한 백합처럼 고운 향기를 전하고 있다.

오래전에 함께 했던 얼굴들을 서로 바라보며 정을 나눔은 말로는 꼭 집어 표현 할 수 없는 따뜻한 마음이 오간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 한곳에 남아있던 이야기들이 작은 공간을 밝은 웃음으로 가득 채운다. 사람들끼리 살아가며 차곡차곡 쌓인 모든 정들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발령을 받고 여러 곳을 다녔다. 가는 곳마다 그 일터를 내 집처럼 생각하며 지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동료들이 내 가족이고 내 삶의 일부분이었다. 그들의 마음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생활을 나누며 지내온 세월이었다. 그래서 이순을 넘은 나이에 나를 찾아주는 동료는 초임 때의 처녀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처음으로 발령받고 초임지에 부임할 때 부모님은 이부자리와 가재도구를 챙겨 내 객지 살림을 준비하여 발령지까지 동행했다. 맏딸을 객지로 내보내시는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셨으면 부임지까지 함께 오셨을까. 아마 그것이 부모님이 딸에게 주신 정이며 사랑이었나 보다.

초임지 6월의 초여름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학교에서 안내해 주는 곳, 부모님과 함께 여장을 푼 곳은 학교 기사의 사랑방이었다. 하늘의 달은 휘영청 밝은데 밤이 이슥하도록 잠은 오지 않았다. 문창호지에 비치는 여름밤의 달빛을 바라보며 뒤척이다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어머니가 석유곤로에 해 주신 밥은 모래알 같았다. 밥을 씹는 것이 모래알 같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날 아침 제천행 버스에 부모님을 배웅하고 혼자 남은 난 학교까지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눈 주위를 적셨다. 그렇게 시작한 교직 생활이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언제 지나갔는지 훌쩍 가버렸다.

며칠 전에 아침인사차 동료가 사무실에 들렀다. 짐 정리를 하느라 널브러진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얼른 나가야겠다는 동료의 얘기에 나 또한 눈물이 핑 돌았다.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가던 발걸음도 요즘은 모처럼 찻집에 들러 여유도 가져본다. 일주일 후면 나는 그들과 이별해야 할 수밖에 없기에.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따라 몸은 움직이지만, 갑자기 퇴임 후를 생각하면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이제 어머니의 애틋했던 사랑도, 동료의 따스한 정도 삶의 한 곳을 채우고 아쉬움 가운데 내게 주어진 새로운 길로 옮길 때가 되었다. 서툰 발걸음을 한발 한발 떼며 또 다른 삶의 한 곳으로 여유 있게 눈길을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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