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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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3.06.0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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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서 온 편지
이수안 <수필가>

포도 꽃 피는 계절이다. 거봉 나무와 청포도 나무들은 지금 한창 연둣빛 화관을 벗는 중이다. 농사꾼의 눈에는 활짝 핀 포도 꽃이 보이지만,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면 포도나무는 지금 산고를 치르는 것으로 보인다.

화관을 벗으면 드러나는 수술이 뽀얗다. 이때가 중요하다. 화관을 벗을 때 암술의 머리 위에 꽃가루를 잘 떨어트려야 수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꿀벌의 도움 없이 스스로 꽃가루받이를 해야 하는 포도 꽃은 그래서 이리 넉넉한 꽃가루를 갖게 된 걸까. 풍성한 꽃가루는 4,500평의 넓은 포도밭을 온통 벅찬 향기로 감싼다.

발걸음을 델라웨어 밭으로 옮긴다. 다른 포도 보다 사나흘 먼저 꽃을 피운 이곳은 조금 다른 풍경이다. 만개 시점을 지나 개화 막바지에 이른 델라웨어는 이제 수정이 거의 이루어졌다. 거봉이나 청포도 나무가 산고를 치르는 중이라면, 델라웨어 나무는 막 출산한 직후의 모습이다.

포도 알은 수정 후부터 커진다. 벌써 통통해지는 포도 알에는 화관과 수술 찌꺼기들이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대엿새 정도 더 지나면 이런 찌꺼기들도 다 분리되고 연초록 아기 포도는 아침이슬 같은 영롱함으로 나를 감동에 젖어들게 할 게다. 산모에게 미역국을 주듯 산고를 잘 치른 포도나무에 흠뻑 물을 준다. 물을 주는 내 마음이 바쁘다.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주일 째 한낮에는 손녀를 만나러 간다. 부지깽이도 뛰어야 할 만큼 바쁘지만 나는 손녀 만나는 재미에 푹 빠져 포도밭을 비운다. 포도농사 지은 지 30년이 되어가지만 바쁜 이 시기 한낮에 집안에서 쉰 것은 처음이지 싶다. 아기는 새싹보다도 나긋한 부드러움으로 그런 내 일손을 단박에 멈추어버린 것이다.

일주일 전, 비 오던 날이었다. 점심때가 가까워도 작은아이가 오지 않았다. 만삭의 몸이지만 일하는 것이 순산에 도움 된다며 매일 포도밭에 오던 아이다.

때가 왔구나 싶었다. 전화를 했더니 한참만에야 사위가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산고를 치르는 작은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많은 일손을 얻어 일하던 날이었는데, 포도밭 일에 지장 있을까 봐 어미에게는 알리지 않은 듯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이거늘 어쩌자고 그토록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산고, 더구나 첫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임에랴. 빗소리에 묻히던 작은아이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자꾸만 울리고 있었다. 포도밭 비닐 천장은 비에 젖고, 내 볼은 눈물에 젖고 있었다.

오후 새참 시간 무렵이었다. 포도 꽃향기 그윽한 포도밭에 딸을 순산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손녀를 얻은 기쁨보다 산고가 끝났다는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째, 나는 아기를 만나느라 가장 더운 한낮에는 서너 시간씩이나 포도밭을 비운다. 넉넉한 모유 덕분에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볼이 통통해져 간다. 꽃이 핀 후부터 시시각각 통통해지는 연초록의 포도 알처럼 말이다. 아무리 바쁜들 오전 내내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기를 내 어찌 안보고 일만 할 수 있겠는가. 빨리 가려고 허둥대기까지 하는 스스로를 보며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이 바쁜 계절에도 매일 보아야만 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보아도 또 보고 싶은 이 끌림은 무엇일까.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이 감정을 사람들은 내리사랑이라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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