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명작가 각종 공모전 입상 … 사진작가로 명성
<13> 무명작가 각종 공모전 입상 … 사진작가로 명성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3.04.1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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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영 사진가의 한국 사진史
김정래 '하오' 경성일보 1933. 8. 25. 경성일보 현상모집 사진 1등작.
사진공모전과 작품사진들

정인영 <사진가>

고감도 감광판·필름 판매
빠른 노출…사진작업 원활

예술사진 애호로 급속 전파
신문사 공모 360여점 출품

입상 우열 작품평가 달라져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문화예술이 발전하자 사진은 다양화되었다. 이에 따라 아마추어 사진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예술사진에 심취하면서 사진 기술분야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고감도 감광판과 필름이 판매되었다.

H&D200에서 320이던 필름이 1920년대에는 H&D750까지의 고감도로 나와 빠른 노출로 사진가의 필요에 따른 사진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제한적인 사진에서 표현의 시대로 옮겨진 사진은 사진작품, 즉 예술사진이라는 애호로 퍼져갔다.

이 시대 사진가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촬영기사 외에 생업에 종사하는 생활인으로 조선총독부 고관, 기업가, 화가, 자유업자와 금고수리전문가 등 다양했다. 초기에는 무명으로 작업하던 사진가들이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여 선정되면서 사진가로서의 명성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한 첫 공모전은 1914년 매일신보에 게재된 성우사진회(成牛寫眞會)였다. 이 공모전에서 2등 당선한 최창근의 ‘한가한 여름날의 적막한 촌가’가 매일신문에 게재되었다.

1929년과 1931년에는 정해창과 서순삼이 서울과 평양에서 예술사진전람회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사진으로 각광받으면서 사진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1936년 6월 1일부터 경성 미쓰이 갤러리에서 개최된 '제1회 소형 카메라전' 경성일보 1936. 6. 3.

1922년 매일신보가 일요현상 모집, 경성일보는 납량사진 모집과 아마추어 사진모집, 동아일보의 예술사진 모집, 조선일보의 납량사진 현상모집이 있었으며, 전조선사진연맹의 전조선사진전과 조선의 몸 현상사진 모집 운(雲) 사진전람회 사진살롱은 총독부기관지인 경성일보가 주최하여 영향력이 컸다.

한편 민족사진가들이 주최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의 인화전람회와 조선사진전람회 외에도 공모전은 1940년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공모전을 위한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작품의 평가 또한 공모전 입상우열의 결과에 따라 정해졌다.

1929년 8월 조선산업박람회기념 전국예술사진공모전에서 박필호의 ‘오후’가 특선한 이후 공모전이 한국인주최와 일본인기획공모전, 해외공모전으로 개최되었다.
납량사진 현상모집 공고. 조선일보 1938. 6. 5.

조선일보는 1937년 납량사진 현상모집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주최한 유일한 전국행사였다. 조선일보 납량사진 현상모집은 2회에 부상으로 상금 100원이 수여되고 가작에는 신문 3개월 구독료를 걸어 총 278점이 응모했고, 3회에는 무려 360여점이나 출품되었다.
조명원 '눈오는 거리' 1939. 일본사진연감 수록작품

3회 공모전에서 서순삼의 ‘아침’ 최계복의 ‘초하의 교회’와 ‘여름구름’ 김정래의 ‘한강의 돛단배’가 특선했으며 이태웅의 ‘여름풍경’ 2등, 김병수의 ‘투명’ 2등, 김순영의 ‘하동군상’가장, 최계복의 ‘해녀’ 가작, 김용구의 ‘낙조’ 가작, 이형록의 ‘어항의 황혼’이 가작에 올랐다.

경성일보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한국인 사진가로는 1933년 여름현상사진공모전에서 김정래와 박필호가 각각 1등과 가작을 했으며 1935년에는 이태경의 ‘K씨의 인상’이 특선 1석을 받았다.

1937년의 전조선사진연맹주최 제4회 살롱에서 임응식의 ‘둑을 걷다’, 이발완의 ‘광(光)과 영(影)', 김원성의 '소춘일화(小春日和)', 서병직의 '망(網)’이 입선했으며 1938년에는 현일영이 '봄의 스케치'로 준특선 4석을 차지했고 1939년 최계복의 '경주첨성대‘가 1등했다.
정도선 '소년 항공사' 경성일보 1941. 제8회 전조선사진전람회 특선 2석

이 시기 일본에서 주최한 사진공모전에는 현일영이 오사카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상업예술사진 현상모집전에 '메가네 간유(肝油)'를 출품하여 2등에 당선되었다.

1934년 일본 연광사 발간 사진살롱 월례작품집에 임응식의 '유리의 정물'이 입선하였다. 최계복은 1937년 전일본 오리엔탈사진전에서 은상했고 일본 후지필름주최 전일본사진전에서 1등으로 입상했다.

1939년 이해선, 조명원, 정몽석의 작품이 아사히신문 사진연감에 수록되었으며 일본기원 2600년 기념 사진공모전에서 이해선이 '촌동(村童)'으로 입선했다.

정도선은 1940년과 1941년 전일본사진보국회 제11회 추천작선정에 당선된데 이어 일본사진문화연맹주최 월례 제1부에서 최고득점상을 획득하였다. 최봉희은 일본사진문화연맹 주최 원례 제2부에서 최고득점상을 받았다.

이처럼 각종 공모전에서 뽑힌 사진들을 살펴보면 이해선의 빛에 의한 정물표현, 현일영의 이미지, 최계복 정도선의 향토, 임응식의 피그먼트인화와 연초점렌즈 효과가 예술공모작품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이루었음을 볼 수 있다.

 

1935년 4월 덕수궁에서 열린 전조선사진연맹 봄 촬영대회, 경성일보 1935. 4. 15.
최계복 '여름구상(丘上)' 1939, 제2회 조선일보 납량사진 공모 1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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