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지 못한 남자' 광해군
'왕이 되지 못한 남자' 광해군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2.09.05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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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영화나 소설은 역사 서술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을 버무린 팩션영화는 더욱 그렇다. 19일 개봉되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1575~1641)이 독살 위기로 한 천민을 자신을 대신해 왕 노릇 시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떠오른다.

이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의 한 기록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광해군 8년(1616년) 2월 28일, 왕은 "숨겨야 될 일은 조보에 내지 말라"고 했다. 조보(朝報)란 조선시대 조정의 일을 전하는 소식지로 왕의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영화는 이 '숨겨야 될 일(可諱之事)'에 무슨 큰 비밀이 있는 양 상상력을 동원해 뻥튀기했다. 숨겨야 될 일은 광해군이 다른 이로 하여금 왕 노릇 시키는 것이다.

영화는 실록에서 광해군의 15일간 행적이 사라진 것을 추적했다고 했으나 그건 광해군일기 정초본에 기록이 없을 뿐이지 중초본에는 광해군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서로 휘갈겨 쓴 중초본을 정서한 정초본엔 무슨 연고인지 기록이 누락된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를 계기로 광해군이 다시 주목받을 듯하다.

정작 광해군은 '왕이 되지 못한 남자'다. 태조ㆍ태종 등과 달리, 죽어서도 묘호(廟號) 없이 군(君)으로 불린다. 그에 관한 기록도 '실록'이 아니라 '광해군일기(日記)'로 낮춰 불리고 있다. 이 같은 왕으로 연산군(1476~1506)이 또 있지만 광해군은 그와 비교되기엔 억울하다.

"광해군은 영특하여 신민(신하와 백성)이 복종하니 전라도ㆍ충청도에 머물면서 방어를 책임져라…부왕(선조)의 실패를 만회해 국가를 보존토록 하라."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 조선을 지원한 뒤, 19세 광해군에게 보낸 칙서다. 명은 선조를 제쳐 놓고 광해군을 치켜세우고 있다.

광해군은 선조가 낳은 서자 13명 중 둘째였다. 선조가 피난길에 나서면서 신하들 독촉에 서둘러 정한 왕세자다. 선조는 중국 피난을 생각하며 세자에겐 전시 임시조정(分朝)을 맡겨 전쟁터로 내몰았다. 어린 광해군은 평안도ㆍ함경도ㆍ경기도 등을 1년 넘게 돌면서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독려했다. 야영도 불사하며 적진을 누볐다. 광해군의 이 활동에 백성은 "나라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며 힘을 얻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나라를 구한 이로 이순신ㆍ권율ㆍ의병장 외에 광해군을 꼽기도 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19세 왕비를 새로 얻어 적장자(영창대군)을 얻는다. 서자 광해군의 불안은 컸지만 선조가 2년 후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잇는다.

광해군은 백성들 공물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했고, 허준을 시켜 '동의보감'을 저술하고 국가 재정을 위한 양전(量田)사업을 시행했다. 무엇보다 강대해진 여진족(후금)과 명나라 사이 줄타기 외교로 전쟁 재발을 막았다.

그러나 무리한 궁궐 공사와 측근들 등쌀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면서 대다수 신료의 신망을 잃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았고, 인륜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았다. 이후 인조와 반정세력도 광해군과 같이 후금과 명 사이에서 눈치보기 외교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왕 중 조카ㆍ친동생을 죽이는 등 인륜을 저버린 왕도 있었다. 하지만 노산군은 240년 후 단종으로 왕위를 되찾았으나 광해군은 끝내 왕이 되지 못했다. 조선 땅에는 그를 옹호해줄 북인 세력은 사라졌고 서인(노론)과 남인만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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