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4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4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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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상품으로 박제된...인륜마저도 저버린 사랑의 비극
경주를 실크로드의 동단으로 보는 견해는 매우 고무적이다. 나는 21세기의 문화관광적인 측면에서 설악산과 금강산, 아름다운 동해바다가 태평양을 향해 열려있는 동해를 기점으로 중국 시안까지를 잇는 코스를 새로운 개념의 관광루트로서 투어리스트 실크로드라고 지칭하였다.

앞으로 남북철도 연결과 남북통일 시대가 도래하면 물질적인 교류 못지않게 관광교류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 못지않게 관광산업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 관광자원의 비중과 전망을 심도있게 연구하여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적절히 잘 활용해야 할 때이다.

3천 년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중국 제 1의 고도(古都) 시안은 중국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周), 진(秦), 한(漢), 수(隨), 당(唐) 등 11개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던 중국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시 중에 하나이다. 샨시(陝西.섬서)성은 중국 서북지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안은 인구 약 4백만에 달하는 샨시성 성도이다.

샌드위치와 주스로 아침을 먹었다. 고원지대를 벗어나자 열이 많이 내렸다. 오전 9시에 투숙했던 외국인 배낭여행객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패키지 투어에 나섰다.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북문에 도착했다(입장료 8元).“고성제일문(古城第一門)”이라는 현판을 보면서 벽돌 계단을 오르면 명나라 때 만들어진 높이 38m의 3층 종루가 나타나 시가지를 전망하기에 좋다.

성벽의 높이는 12m, 둘레는 11.9m이며 폭은 위가 12-14m, 아래가 15-18m로 차량 3대가 지나갈 수 있는 넓이다. 성벽 앞 종루에는 명숭 정년(明崇禎年)에 주조된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다. 성벽과 성곽이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 매우 부러웠다. 고성의 안은 기념품 가게가 있다. 2층의 자개농 전시장은 종루와는 이미지가 맞지 않아 고성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하고 있다.

성문을 벗어나면 시가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낙후된 주택밀집 지역과 허름한 공장과 가게들이 성 밖으로 나타난다. 30분쯤 달려 진시황의 병마용을 만드는 공장을 방문한 후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리산(驪山.려산) 산록에 있는 후와칭츠(華淸池.화청지)에 도착했다(입장료 40元).

시안시 동북쪽의 30km 지점에 있는 리산은 온천지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후와칭츠가 가장 유명하다. 원래 후와칭츠는 2,800년 전 주나라 때 왕실의 별궁으로 건립되었는데 진시황은 화려한 리궁별관을 짓고“리산탕”이라 불렀다 한다. 당대에는 온천주변에 많은 전각을 짓고“탕천궁”이라 하였다가 747년“후와칭츠”라 개칭하였다.

매표소를 지나자 넓은 정원에 연못이 나타났다. 이곳은 중국의 일반지역과는 달리 엷은 남색계통의 비취색 물 빛깔을 가진 연못이 있다. 이 정도의 물 빛깔은 해발 3,000m 정도의 지우자이거우의 물빛보다는 투명하지는 못하지만 해발 2,000m 정도의 암벽산 정도에서 볼 수 있는 물의 색깔이다. 장자지에의 암벽들은 석회암이 적게 함유된 암벽이라서 우리나라 시골마을의 계곡 수준은 되지만 낮은 리산의 지대로 볼 때 수도 주변에 이 정도 수준의 물빛과 섭씨 43도를 유지하는 온천이 있다는 건 중국 땅에서는 매우 희귀하다.

양귀비와 당현종이 나눈 세기의 로맨스 에머랄드빛 연못인 구룡호(九龍湖) 정면에는 요염한 유방에 한쪽 다리를 부드러운 치마폭으로 살짝 가린 날신한 키에 통통한 얼굴을 한 서역 여인의 조각상이 눈에 띈다. 조각상 주변에 몰려든 붕어 떼들에 싸여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다.

이 여인은 이집트의 크레오파트라와 더불어 고금에 가장 널리 알려진 양귀비의 조각상이다. 그녀의 “출욕도”를 보면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그리 사랑 받을 미인상이 아닐 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한족여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이국적인 풍모를 가진 서역 계통의 여인이다.

양귀비는 서기 719년 쓰찬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그의 선조는 서역인이라는 설이 강하다. 오라버니인 양국충은 비만한 체구에 서역 호선무(胡旋舞)의 대가였다. 양귀비 역시 서역인 특유의 풍만하고 육감적인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의 미인은 수형미인상(秀形美人像)이 아닌 풍만한 서역 미인 형이 중국 미인의 척도였다.

양귀비는 당 현종(玄宗)의 18왕자인 수왕(壽王)의 비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일어난 로맨스로 인하여 안록산의 난과 더불어 당나라의 국운을 결정적으로 기울게 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여인이다. 56세의 시아버지인 당 현종이 그의 며느리인 22세의 양귀비에게 푹 빠져버렸으니 인륜도 사랑 앞에서는 눈먼 것인가 보다.

아무리 황제라도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는 세인의 눈이 있어 수왕의 집을 나오게 하고 출가시켜 여도사(女道士)가 되게 한 2년 후에 양옥환을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인 귀비(貴妃)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 당시 육로를 통해 당나라로 온 서역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한 곳은 장안이었고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였다. 약 100만의 인구 중 서역인을 비롯한 외국교민이 2%, 돌궐족까지 합치면 5% 정도가 외국인이었다. 당대의 혼혈 문화인 중에 출세한 문무고관대작이나 명류들이 수두룩하였다. 당대의 대시인 이백(李白)도 중앙아시아의 호객(胡客)의 후예이며 백거이(白居易) 역시 구자인의 후예이다. 장안에 상주하는 서역인들은 상역(商易)이나 예능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재상이나 장군으로 중용되는 등 권력구조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대의 이른바“서역풍” 혹은“호풍(胡風)”은 가무와 회화, 건축, 복식, 음식, 오락 등 사회생활 전반에 풍미하였고 특히 수도 장안은 그 극치였다. 서역의 호악(胡樂)과 호무(胡舞)는 당대의 가무 분야를 휩쓸다시피 했다. 당대의 외국음악은 십부악(十部樂)이라 하여 그 중에 칠악(七樂)은 서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서역칠조(西域七調)라 칭했다.

이 음악은 비파를 주요한 악기로 사용하였는데 서량악(西凉樂), 천축악(天竺樂), 쿠차악(龜玆樂), 안국악(安國樂), 소륵악(疎勒樂). 고창악(高昌樂), 강국악(康國樂)으로 그 중에서도 쿠차악이 가장 번성하였다.

<구당서> 여복지(舊唐書 輿服志)에 의하면 당 현종 개원년간(開元年間, A.D.713-741) 이래 태상(太常,종묘의 의식을 담당하는 관직)의 음악은 호곡(胡曲)을 존중하고 귀인의 식사는 모두 호식(胡食)을 올리고 남녀 할 것 없이 다투어 호복(胡服)을 입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한류열풍도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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