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생활 도구 <36>
잊혀진 생활 도구 <36>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1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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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래
몇년전 전라남도 지방으로 사진 촬영팀을 인솔하고 가는 중에 차안에서 무심코 밖의 풍광을 보다가 반갑고 진기한 모습을 발견하였으나 사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한 일이 있다.

당시 정경은 넓은 논배미를 경운기로 갈아엎고 골을 켠 뒤에 힘좋은 남정네가 ‘곰방메’로 흙을 부수고 나가면 보리를 뿌린 고랑을 따라 아낙네들이 ‘고무래’로 잔흙덩이를 부수고 덮는 모습이다.

1960년대나 볼 수 있었던 보리갈이 정경이었다.

여기서 ‘곰방메’나 ‘고무래’는 요즘 보기 어려운 농기구다.

곰방메는 흙덩이를 깨트리거나 씨를 뿌리고 흙을 덮는데 쓰는 농기구로, 둥근나무 토막에 긴 자루를 끼워 ‘ㅜ’자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고무래는 곡식을 그러 모으거나 펴거나 또는 논밭의 흙을 고르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 내는데 쓰는 나무로 만든 ‘ㅜ’자 모양으로 된 기구.고무래는 두꺼운 송판을 길이 40㎝ 높이 15㎝ 정도로 자르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긴막대를 끼우고 움직이지 않도록 쇠못을 박아 튼튼하게 만든다.

자루긴 고무래는 탈곡을 한 곡식을 멍석에 펴고 고르게 햇볕을 쬐어 건조되도록 저어 주는데 사용된다.

또한 자루가 작고 가벼운 고무래는 부엌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고 타고 남은 숯불을 화로에 담거나 타고 남은 재를 한곳에 모아둘 때 그러 모으는 생활도구다.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 민족에게는 잊지 못할 고통스런 ‘보릿고개’가 있었다.

가을에 추수한 쌀(곡식)이 겨울을 지나고 5월쯤 되면 식량이 떨어져 배고픔이 시작되지만, 마땅히 먹을거리가 없어 보리가 익는 6월중순 때까지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채우며 기다리는 시련기를 ‘보릿고개’라고 했다.

농토가 많은 부잣집은 먹고 남는 쌀을 장리(봄에 꾸어준 곡식에 대해 가을에 그 절반을 이자로 쳐 받는 금리)로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불려 나가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보릿고개 때 쌀1가마(10말)를 ‘장리쌀’로 먹으면 가을에 추수하여 15말, 즉 50%를 더 갚아야 하니까 다음해 곡식이 날때까지는 식량이 모자라 또다시 장리쌀을 얻는 악순환이 이어져 도저히 가난을 벗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부이남 따뜻한 지방에서는 모자라는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가을에 벼 수확이 끝나면 논밭을 갈아 보리를 심었는데, 이때 꼭 필요한 도구가 ‘고무래’와 ‘쇠스랑’과 ‘곰방메’였다.

땅 많은 부잣집은 머슴을 몇명씩 두고 농사를 지으며 많은 품을 얻어 보리파종을 하지만, 가난한 농가는 식구수대로 들로 나가 가장은 소를 이용, 논밭을 갈아 골을 치고 나가면 가족들이 뒤따라 씨를 뿌리고 고무래로 흙을 덮어 보리파종을 끝낸다.

1970년대 통일벼가 개발돼 쌀생산이 늘고, 외국서 보리와 밀이 수입되면서 벼농사와 보리농사로 이어지는 이모작(二毛作)이 없어져 가을에 보리파종 하는 모습도 보기 힘들게 됐다.

그런데 요즘 다시 우리나라 남부지방 일부 지역에서 보리와 밀농사가 시작되면서 고무래를 가끔 볼수가 있는데 지금은 나무 고무래 대신 쇠로 만든 도구가 사용되기도 한다.

과거 농촌에는 농사짓는 고무래, 도시에는 아궁이에 불때는데 요긴하게 쓰이던 고무래가 농기구가 발달하고 난방형태가 편리해진 요즘 없어진지 오래지만 자라나고 있는 요즘 아이들은 고무래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글·사진 김운기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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