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 꽃이 지고나면
마로니에 꽃이 지고나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6.2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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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영희 <수필가·충북교육과학연구원 총무과장>
   주차를 하면서 보니 직원 주차장 앞의 마로니에 나무에 꽃이 피었다. 이곳에 오기 전 근무처 정문 언덕 위의 큰 마로니에 나무가 생각났다. 가을이 오면 초록의 정장에 빨간 액세서리로 성장을 하고 제일먼저 다가와 가을의 전령사 노릇을 하던 나무다. 여기 첫 출근하던 날은 눈이 새하얗게 내려서 마로니에 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봄이 되어 잎이 나면서 마로니에라는 것을 알고 인연이 이어지나 싶어 반가웠었다. 다시 둘러보니 여러 그루의 마로니에가 더 있고 느티나무, 반송, 모과나무, 소나무, 주목 등이 아름다운 건물을 감싸고 있다.

어렴풋이 이 꽃이 지고 열매가 열 때쯤 이곳을 떠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시나브로 그 시점이 다가왔다. "영전을 축하한다"는 지인들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경하 드린다", "감축 드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요즘도 저런 고풍스러운 표현을 하는구나 싶었지만 축하받고 감사하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 와서 한껏 업 되는 기분이 들었다. "축하한다고 해도 되는지"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반대로 그런 시각도 있구나 싶어 찜찜해져서 한 마디 말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이 있으면 만났다가 인연을 다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고 하여 불가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고 그 범주의 한가운데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불투명하니 현재 이곳에서 이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 했는데 막상 발령이 나고 나면 영원히 같이 살 것같이 착각하고 생활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동안 고맙고 좋은 일도 참 많았지만 혹시 업무를 처리하면서 본의 아니게 서운하게 했다거나 훈장처럼 남아있는 코 밑의 상처는 자판이라면 델리트키로 지우고 싶은 부분이다. 한겨울 극기 훈련을 가서 무단 횡단하는 사람 때문에 빙판에 급정거를 하여 다친 일은 한동안 많은 것을 위축시켰지만 내게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인생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고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것을 체감하게 하려는 신의 섭리였는지.

인연으로 맺어져 많은 경험을 하고 이제 연이 다해 내일부터 새로운 근무처로 출근을 하여 다른 인연을 맺게 될 것이다. 인사를 갔을 때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지금 어디 사느냐고 해 그 집에서 더 오래된 그때 그 사람과 산다는 말을 하며 9년 전 그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때를 생각하니 인연의 끈이 보이는 듯했다.

지난해부터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난(欄)을 쓰면서 '내 글을 기다리는 한 사람의 진정한 독자가 있다면 그를 위해 열심히 쓰겠다'는 마음으로 첫새벽 남보다 먼저 일어나 자판을 두드리던 일은 내게 기쁨이었고 카타르시스였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다하는 네가 부럽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인데 너무 자주 써서 안티 팬이 생기지 않을까" 하며 부러움 반 걱정 반을 하던 친구를 비롯한 독자들과 부족한 글을 일일이 찾아서 올려주신 분들께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고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듯 팬이고 안티 팬이고 동전의 양면처럼 보는 방향과 입장에 따라 다른 관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화향 천리(花香千里) 인향 만리(人香萬里)라는 구절의 1프로라도 흉내 내려는 몸짓으로 지나간 인연도 새로운 인연도 다 소중히 여기며 후회 없는 삶으로 거듭 나고 싶다. 마로니에 꽃이 진 자리는 더 짙푸른 잎으로 태양을 감싸며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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