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도 노래한 발라드
살인사건도 노래한 발라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4.2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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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겸의 안심세상 웰빙치안
김 중 겸 <경찰 이론과실무학회장·전 충남지방경찰청장>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클래식은 특권층 전유물이었었다. 왕과 귀족을 위한 궁정음악이었다. 중산층 및 하층민의 귀에는 도달치 않았다. 별도의 음악이 존재. 바로 민요 folk song이다.

물론 종교의식용은 공유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노동을 그들 특유의 노래에 의탁했다. 농업사회라서 농촌을 중심으로 생성하고 발전했다. 희로애락을 읊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이 이뤄졌다. 문화란 인간접촉의 산물. 문화현상으로서의 음악도 그렇다.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살이 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변한다.

궁핍한 노동자에게 민요는 나름대로 존속했다. 실직과 가난의 울분을 토로하는 역할. 하지만 목가(牧歌)풍은 입지를 상실. 템포가 빨라졌다. 내용도 달라졌다. 공업화의 영향이다.

전통 민요가수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변신 도모. 길거리 가수 street musician이 됐다. 노래만으로는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원숭이가 동참. 곡예로 행인의 발길과 눈길을 잡았다.

이도 잠시. 독일에서 온 브라스 밴드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무엇을 어떻게 불러야 먹고 사는가. 궁리하면 답이 나오기 마련. 서사시 스타일의 가곡 발라드 ballade가 탄생했다.

산업시대와 동행한 대중음악이다. 1861년 런던에서 700명 정도의 아티스트가 활동. 가창은 조연이었다. 출판사에 고용되어 노래를 부르며 가사를 팔았다. 구전 1실링을 먹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고 했던가. 뮤지션이 아닌 출판업자가 부자가 됐다. 이렇게 해서 대중음악산업이 발아했다. 오늘날 예능산업 entertainment industry의 효시다.

당시 피투성이 살인사건이 발라드의 스토리로 각광. 1822년 젊은 여인을 살해한 붉은 헛간사건이 터졌다. 재빠르게 가사로 만들어 발매. 백만 부 파는 대박을 터트렸다.

발라드가 정보전달 미디어로도 기능했다는 증좌. 신문이 점차 정확한 뉴스매체로 정착해 나갔다. 또 실직위협에 직면하고 말았다. 발라드 출판사도 1871년에는 네 곳으로 대폭 줄었다.

가수들은 술집 테이블 돌며 노래하는 길을 찾았다. pop music의 생존역정. 음악애호가치고 악인 없다 한다. 그대는 음악에서 위로의 가닥을 찾는다. 안심세상 꿈꾸는 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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