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집
요정의 집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4.2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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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 영 희 <수필가 · 충북교육과학연구원 총무과장>

어제는 현란한 자태를 자랑하는 영산홍이 미인대회에 출전한 아가씨 같은 미소를 짓더니 오늘은 앙증맞은 하얀 꽃이 시골에서 전학 온 소녀처럼 수줍게 배시시 웃는다. 동양에선 쑥갓이 홍역을 앓은 아이들 변비나 뱃속이 불편할때 삶은 물을 먹이면 잘 낫는다고 해서 민간요법으로 쓰여 왔고 흔히 채소로 먹는다.

서양에선 화초로 통용된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고서 문화의 차이가 이렇게 큰가 싶었었다.

그 쑥갓 꽃을 여기서 반갑게 만났는데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더니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사랑을 점친다.'는 꽃말을 가진 마아가렛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봄이 시작되면 앙다문 목련 봉우리가 언제 터지려나 싶어서 들고 날면서 매일 지켜보고, 그 꽃이 피고나면 또 갑자기 변색되어 떨어질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지내왔다.

그랬는데 올봄은 달랐다.

어느 시인이 "4월은 누군가 홀연히 다가와 사막 같은 내 창에 등불을 거는 이"를 노래했는데, 그 실체를 보여주듯 등불 같은 꽃밭이 나타나 '요정의 집'으로 명명했다.

처음에는 관리사무소에서 우리아파트 화단의 백목련 나무와 향나무 사이를 새롭게 개조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누군가가 우리 옆 통로 앞의 나무가 없는 2평 정도의 한정된 공간을 이용하여 아기자기하게 갖은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몇 개의 항아리와 시루를 보기 좋게 놓고 그 사이에 물레방아, 지게, 짚신, 발 등을 설치 한 후 진달래, 영산홍, 매화, 비올라, 팬지 등을 심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보니 또 몇 가족이 이사를 왔다. 꽃 잔디로 레이스가 달린 것 같은 귀여운 모습을 만들더니 수선화, 금낭화, 할미꽃까지 심어서 고향의 동산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연출을 했다.

해가 졌는데도 향기에 취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고 달 밝은 밤에는 몽유병 환자처럼 꽃밭주위를 배회하는 날이 늘어간다.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꽃들을 들여다보느라 쓰레기통을 그냥 놔두고 올라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로가에 꽃을 심으면 뽑아가곤 해서 시청에서 골머리를 앓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양심 있고 착한 이웃들과 꽃 속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 오늘은 흰 꽃에 붉은 빛이 감도는 모란과 패랭이꽃이 청신한 눈길로 발걸음을 붙잡는다. 나비가 없는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안 지혜의 여인 선덕여왕의 설화와 4·19 의거일에 흰 꽃을 심은 뜻을 생각해 본다.

또 이 패랭이꽃은 석죽이라고 부르며 우리 산야에서 흔히 보는 야생화로 알고 있는데 영국에선 여왕의 대관식 모자에 흰 패랭이꽃을 얹어 만인의 가슴에 순결하고 깨끗한 나라사랑의 마음을 심고, 미스월드의 머리위에도 구름패랭이꽃을 꽂는다는 패랭이꽃의 내력을 알게 됐다.

아파트 화단은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울타리도 없는 밖의 공간에 귀한 꽃들을 과감하게 내다 심어 햇볕 속에서 비바람과 친하게 하고 이웃에게 무한정의 보시를 하는 화단의 주인은 누구일까.

궁금해서 1층 벨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자 서운하면서도 어쩌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단순하게 꽃처럼 예쁜 마음을 가진 미의 여신 같은 숙녀를 기대하지만, 인생을 살 만치 살아 삶의 문리를 터득한 연세가 지긋한 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요즈음의 어려운 경제난에 봉착해서 꿈의 휴식처를 잠시 화단으로 옮겨놓았는지도 모르고.

설사 어떠한 여건이라도 그분의 공덕으로 인해 주위의 이웃들이 모두 행복해 하니, 주는 마음도 없이 보시하는 것을 실천하는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따뜻한 분에게 정원이 한껏 넓어서 마음대로 보여줄 수 있는 전원주택이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따라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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