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자들의 도시와 이미지 메이킹
눈먼자들의 도시와 이미지 메이킹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0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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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포르투갈 출신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가 1995년에 발표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그의 작품 '눈먼 자들의 도시'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이 소설이 최근 페르난도 메이렐리스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데서 기인한다.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를 헤드카피로 내세운 만큼 이 영화는 무겁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다.

평범한 일상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교차로 한가운데서 앞이 보이지 않고, 이후 그를 집에 데려다준 남자도, 그의 아내도, 치료한 의사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정체불명의 이상 증후군. 이런 눈먼 증후군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확산되고, 마침내 도시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이들을 격리수용하게 되고, 이 와중에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를 자처하는 한 여인(줄리안 무어 분)이 인간이 처한 아수라장의 현장을 처절하게 관찰한다.

평범한 일상과는 철저하게 격리된 '눈먼 자'들의 그들만의 세상.

그곳에는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그 공간과 인간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고, 오직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행되는 인간의 극단적인 탐욕과 무질서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원작에 지극히 충실하다.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이 희망이 아닌 두려움으로 자리하고 있는 영화 속 그녀는 누군가는 반드시 목격해야 하고, 누군가는 또렷이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진실의 규명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순식간에 화면 전체가 희뿌옇게 전개되는 장면의 반복은 격리 수용된 상태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극단의 상황에서 관객을 포함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징한다. 이쯤에서 도대체 눈을 뜨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그 반대의 경우에서 비롯되는 참혹함에 인간은 얼마나 스스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이 영화는 비교적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원작을 영화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때문에 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비교적 담담하게 원작에 대한 영상화를 시도했고, 이런 기저로 인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길다.(러닝타임 120분)

문제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영화적 특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이미지의 새로운 창출이라는 과제에 얼마만큼 도달했느냐에 있는데 그런 구조적 변환은 문자와 영상이 갖는 변별력만큼이나 쉽지 않다.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그의 책 마인드 세트(Mind Set)에서 "문명의 역사는 곧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문자에서 시각 언어로 옮겨간다면 우리는 원활한 상호작용을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각적 서사가 문학적 서사를 압도하는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존 나이스비트의 견해는 원작과 그를 영화화하는 사례가 많은 최근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무조건적인 이미지로의 편향보다는 "시각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경쟁력은 기술 및 예술교육에서 나올 것이다. 과학 기술이 이끄는 지성과 시인의 감성 말이다. 우리에게는 컴퓨터와 시인 둘 다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 숨죽이며 한겨울을 보내는 우리 서민들에게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참혹함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이라도 제시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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