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좋은 거짓말
기분좋은 거짓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0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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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발언대
이 유 선 <청원 내수중 교사>

'내겐 너희들만한 자식이 둘이나 있단다. 둘 다 중학생이지.'

'정말요 우와∼ 안 믿겨진다.'

'그럼 선생님 나이가 몇 살이세요'

'야,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당연히 마흔이 훨씬 넘으셨겠지.'

'아냐. 그렇게까지 보이지 않는데. 참 이상하다.'

아이들과의 첫 대면부터 미리 설정한 대본대로 연기를 한 터라 절대 아이들의 의심에도 흔들림없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속으로야 "사실 난 아기 낳은 적 없어. 그래도 너희들이 내 자식같아. 때론 속 썩이고 때론 효도하고. 그러니 너희들 모두가 내 자식이나 진배없지 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에게 엄마 같은 첫인상을 심어주어 정말 아프고 힘들 때, 시시콜콜한 수다 떨고 싶을 때, 고자질해서 분풀이하고 싶을 때 서슴없이 제일 먼저 날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사실 아이들에게 담임 교사는 엄마처럼 푸근하고 살뜰히 챙겨주면서도 잔소리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사람이다.

언제든 달려와 고민을 털어놓으면 귀담아 들어줘야 하고 마음이 힘들어 눈물을 흘릴 땐 말없이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항상 곁에서 "바닥에 쓰레기 좀 줍자,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 제발 공부 좀 해라, 친구들과 싸우지 마라, 무단 외출해서 군것질하지 마라' 등등 하루에도 수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땐 영락없는 보통 엄마들의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조용해야 할 교무실이 쉬는 시간만 되면 소소한 일로 찾아오는 아이들 때문에 시끌벅적해서 주변 분들에게 민폐가 심하다.

'샘, 영은이가 수돗가에서 제 옷에 물 끼얹었어요. 혼내 주세요.'

'어, 그래. 옷이 젖어 많이 속상하겠구나.'

평소 깔끔하기로 소문난 "왕자병' 정만이 입장에선 성날 일이다. 졸업 앨범 촬영 때문에 동복 상의를 준비해 오라고 한 날 자기 집에서부터 재킷을 옷걸이에 건 채 들고 조금이라도 구겨질세라 고이고이 등교한 바람에 우리반 전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사건의 주인공답다. 이 아이의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곤 친구의 장난으로 습격을 당한 피해자의 호소를 들어주고 다시는 이런 장난을 치지 않도록 그 친구에게 주의를 주겠단 약속을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금세 아이 표정에 미소가 번진다. 이렇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아이들이 내게 선물하는 일종의 비타민이라서 일상을 더 생기 넘치고 재미있게 만드는 효력이 있다.

그러다 가끔 심각한 일이 일어나 긴장하는 날도 있다. 한 번은 우리반 아이가 친구와 다툰 뒤 죽고 싶다는 암시를 남긴 일기장을 두고 잠적한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 아이는 사정이 있어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던 터라 어디로 갔는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너무 일찍 혼자가 되어 외롭게 지내왔기 때문에 더더욱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기댔던 친구와의 갈등과 절교 선언은 이 아이로부터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간밤에 할머니댁에 찾아갔다는 연락이 왔고 다음날 무사히 학교에 나오게 되었지만 예전의 밝은 미소를 자주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갈수록 이혼이 급증하면서 고아 아닌 고아가 늘어가는 걸 눈 앞에서 지켜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무겁고 아프다.

막상 아이들 앞에선 '학교에선 내가 너희들 엄마고 아빠야'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리운 아이들에게 진짜 엄마 노릇을 하는 일은 막막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속 주인공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 아이들 얼굴에 언제쯤 환한 햇살이 가득하게 될는지. 이 아이들의 마음에 희망의 싹이 트고 그들이 꿈을 가꿔나갈 수 있도록 난 무엇을 해야 하나 오늘도 또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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