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암과 라일라
마리암과 라일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03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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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스티브 맥커리가 찍은 '아프가니스탄 소녀'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강렬한 눈빛과 표정없는 얼굴의 묘한 균형이 낯설었지만 한층 흡인력있게 다가오던 느낌을 잊지 못한다. 먼 나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한 소설을 읽었다. 비슷한 흡인력에 이끌려 책을 읽고 난 지금, 얼마동안은 기다리기로 한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서서히 풀어져 내 속으로 골고루 퍼지기를, 먼 아프가니스탄 여인인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이 어느 한 자락이나마 우리의 삶과 이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한동안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다음, 풀어진 이야기 가닥을 진열대에 늘어놓듯 펼쳐본다. 펼쳐지는 생각의 가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소련의 침공으로 첨예화되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의 비극적 굴곡, 전쟁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서는 하찮은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삶의 이율배반성, 두 여인의 아버지뻘인 남편 라시드의 가학적 폭력. 많다. 그중에서 진열대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삶에 대한 자기 선택 혹은 결정'이라는 생각의 묶음이다.

주인공 '마리암'은 사생아로 태어난다. 아버지 '잘릴'의 위선으로 마리암은 유폐되듯 외딴 집에서 성장하지만, 그를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마리암은 아버지에게 거부당하고, 그의 정실부인들에 의해 고향 헤라트로부터 멀리 떨어진 카불로 강제결혼이라는 형식의 유배를 당한다. 그녀에게 카불은 낯선 곳이다. 게다가 나이 많은 홀아비였던 남편 라시드의 친절은 얼마가지 않아 끔찍한 폭력으로 바뀐다. 마리암이 고통일 뿐인 삶을 인내하며 살아가는 동안 소련의 공격이 시작되고, 소련이 패퇴한 뒤에는 군벌들이 쟁투하다가 결국 악명높은 탈레반이 집권하게 된다. 탈레반의 권력장악은 그 나라 여성들의 삶에 드리운 최악의 그늘이다. 교육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출산할 때조차 전혀 배려받지 못한다.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마리암은 단 한 번도 자기 삶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가정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비극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숙명으로 견디는 모습, 그것이 마리암의 삶이었고 그녀의 고통이었다. 일부다처제가 공식화된 나라의 구두수선공 남편은 폭격으로 고아가 된 이웃의 어린 여자 라일라를 속여 두 번째 부인으로 삼는다. 이렇게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라일라의 삶도 마리암과 다르지 않다. 잠시 위함을 받다가 곧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녀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내내 따라다니던 의문은 극적인 장면에서 전환을 맞는다. 피란 중에 죽은 것으로 꾸며진 타리크가 옛 연인 라일라를 찾아오고, 그것에 분개하여 그녀에게 살기어린 폭력을 휘두르던 라시드를 마침내 마리암이 처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었을까. 최소한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열어놓는다. 마리암이 라시드를 향해 삽을 내리치는 행위는 질곡을 견디는 것으로 점철된 삶에서 처음으로 행한 자기 선택이고 결정이다. 도망을 하는 대신 죽임에 책임을 지고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하는 비극적 장면으로 귀결되고 있어도, 라일라가 라시드에게 목졸려 죽어가는 상황에서 마리암이 행사한 '자기 결정권'은 라일라와 타리크 그리고 그녀의 두 자녀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밝다. 피란갔던 라일라와 타리크가 폐허가 된 카불로 돌아와 그들의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암이 위기의 상황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했듯이, 라일라도 안정된 현실을 뒤로 한 채 '스스로의 선택'으로 귀향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희망이거나 혹은 구원은 어쩌면 그것,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아닐까.

[ 읽은 책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왕은철 옮김. 2007. 현대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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