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만큼 농심도 헤아리시길
불심만큼 농심도 헤아리시길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8.09.11 2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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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주장
권 혁 두 부국장 <영동>

내가 사는 영동군은 '과일의 성지'를 자처할 정도로 사시사철 과일향이 풍기는 곳이다.

전국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포도를 비롯해 감, 사과, 호두, 배 등 다양한 과실들이 철따라 줄을 잇는다. 시장개방, 비료값과 유가 인상, 수요감소 등 갖가지 악재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동의 과일은 아직도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젖줄이다.

과일의 최대 성수기는 햇과일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추석대목이다. 그러나 추석을 앞둔 요즘 영동의 장날 풍경은 스산하다. 늦여름부터 따기 시작한 포도를 제외하고는 본격 수확철을 맞은 과일이 없다보니 우선 시장의 구색이 예년같지 않다. 사과는 일부 조생종이 시장에 선을 보이고 있지만 배나 감, 대추 등은 대목을 포기해야 할 정도다. 추석이 일찍 닥친 탓이다.

1년내내 땀흘리며 기다려온 대목에 과일을 내지못하는 농업인들의 속은 타들어 간다. 추석이 지나고 날씨가 서늘해지면 과일은 비수기로 들어간다. 이때 출하하는 과일이 제값을 받을 리 없다. 제값은커녕 홍수출하로 가격폭락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 농민들은 엎친데 덮친격이고, 시장에 돈이 돌지않으니 지역 소상인들 역시 죽을 맛이다.

9일 대통령이 방송매체를 통해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던 농업인들은 '역시나'를 되뇌었을 것이다. 불심(佛心)은 대우를 받았지만 농심(農心)은 그렇지 못했다. 비정규직 근로자나 학자금에 고통받는 대학생들도 대통령으로부터 기대 이상의 호의와 호언을 얻어냈지만 농민은 아니었다.

대통령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기업이 좀더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며 해결의 주체로 기업을 지목했다. 비정규직을 구제하는 기업에는 세제 등에서 혜택을 주겠다는 구체적 방법론도 제시했다.

그러나 농촌문제를 질문받은 대통령은 이미 추진중인, 그러나 별반 성과도 없는 농정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이를테면 딸기를 재배하는 농민이 딸기주스를 만들어 팔도록 하겠다는 식이다. 농촌이 단순농업이 아닌 가공까지 겸해 부가가치를 높이도록 하겠다는 것인 데 이미 전국 농촌 지자체들이 수년전부터 사활을 걸다시피 주력해온 정책이다.

영동군도 지난 2004년 지역포도로 포도주를 제조하는 (주)와인코리아에 22억여원을 투자하고, 지금까지 전방위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업체는 아직도 적자운영을 벗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농가에서 수매한 포도값을 올초까지도 완전히 결제하지 못해 군청이 수차례 독촉해야 할 정도였다.

국내 포도주시장은 정부의 시장개방으로 몰려든 값싼 수입와인들이 장악한 지 오래다. 비싼 국내산 포도를 원료로 쓰는 와인코리아의 '악전고투'는 필연적이다. 농업인들이 소규모 생산시설로 생산한 과일주스가 재벌들이 판을 치는 음료시장에 발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다.

대통령이 이 시책을 제대로 설파하려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답변에서 처럼 '농촌문제를 위해서도 대기업들이 좀더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는 공생의 논리를 폈어야 했다. '농산물 가공업은 농촌에 양보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근사한 권유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두부와 오뎅까지 만들어 팔며 영세사업자들의 영역까지 종횡무진하는 대기업들에게 먹힐 리 없겠지만, 농민들은 귀라도 위안을 받았을지 모른다.

이날 대통령은 생활고로 서민들이 한숨짓는 소리를 잘 듣고 있으니 믿어 달라고 했다. 농민들의 한숨소리도 새겨듣고 계시리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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