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善防)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선방(善防)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8.09.01 2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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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 혁 두 부국장(영동)

척불(斥佛)이 관행이 되다시피했던 조선시대 중기 지방에 수령이 새로 부임하면 사찰에서 연회를 열기도 했다. 스님에게 고기와 술을 내놓으라 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까지 즐겼다고 전해진다. 비구니에게 술시중까지 강요했다니 종교탄압이 아니라 인권탄압 수준이었다. 종이나 두부 만드는 부역에도 스님들을 동원했다. 고을 유생이나 관리들이 "절간의 두부맛 좀 보러 갈까"라며 농을 주고받는 것은 술 싸들고 사찰에 놀러가자는 제안을 의미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불교가 가장 먼저 진출한 나라는 독일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불상을 집에 안치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스리랑카로 건너가 유럽 최초의 정식 승려가 된 사람도 독일인이다. 유럽 최초의 불교단체 역시 1921년 뮌헨에서 창립한 '독일불교회'이다. 불교잡지까지 펴내며 6년여간 활동했으나 히틀러의 탄압으로 해체되고 불교서적과 간행물들은 불에 태워졌다. 유럽 최초의 불교 수난사는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자행됐다.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심상찮다. 지난달 27일 범불교도대회에 이어 31일에도 서울 견지동 조계사를 비롯해 전국 사찰에서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을 규탄하는 법회가 열렸다. 불교계는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경질 등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추석 이후 영남을 시작으로 권역별로 대규모 범불교도대회를 재개할 태세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지난달 28일 대통령과 뉴라이트전국연합회원 250여명이 청와대에서 즐긴 만찬이었다. 이 단체의 상임의장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예배를 보기도 했던 김진홍 목사이다. 대통령은 잘 할 테니 앞으로도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다 같은 국민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불자들 입장에서는 고깝게 들을 수도 있는 발언들이다. 종교편향을 규탄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열리고 청와대가 불교계 요구를 일축한 바로 다음날 청와대에서 열린 이 만찬은 자해하는 스님이 나올 정도로 불교계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됐다.

이 만찬이 불교인들을 더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이 약속을 미루지 않고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도대회에 밀려 만찬을 취소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정권 내부에서는 초기에 공권력을 동원해 촛불시위를 잡지못해 질질 끌려다녔다는 자책이 나오는 터이다. 기선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우군의 신뢰도 돈독히 다지자는 포석이 깔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본질적으로 촛불시위와 성격이 다르다. 불교계 반발이 더 거세지면 종교간 갈등으로 치달을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일부 목사의 돌출발언이 불교계에 적잖은 상처를 준 상황이다. 촛불시위가 장기화하며 좌우의 적대적 대처로 비화했듯이 어느 시점에 사안의 성격이 변질될지 모른다. 이런데도 청와대가 촛불시위를 교본으로, 법질서를 명분으로 삼아 강경대응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종교간 충돌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불교계 분노를 조기에 달래야 한다.

청와대의 한 수석이 며칠 전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새 정부가 나름대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아전인수격 발언으로 몰려 야당의 욕도 먹는 모양이지만 눈부신 성공을 일궈냈다는 자찬이 안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선방(善防)의 사전적 풀이는 '공격을 잘 막아냈다'는 것이다. 경제 분야에 한정한 말이지만, 그의 발언은 새 정부가 이곳 저곳의 공격을 받으며 수세(守勢)로 일관해 왔음을 인정하는 말이다. 아무리 잘해도 방어는 공격의 상대적 의미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6개월을 비생산적인 소모전에 써버렸다는 비판을 받는 정권이다. 선방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그나마 명분없는 싸움에서는 선방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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