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선생님의 문학비
교장선생님의 문학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4.0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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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 승 환 <문학평론가>

인간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다. 사단칠정론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뜻하는 수치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심성으로써 인의예지와 사회질서의 기본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은 물성(物性), 특히 동물성을 가진 야수가 되기 때문에 패륜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한편 인간에게는 욕망이라는 것도 있다. 인간의 욕망중에서 가장 큰 것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표현욕망이다. 헤겔은 이것을 인정투쟁(認定鬪爭)이라고 했는데, 인정투쟁이란 다른 사람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인정받기 위하여 타자와 투쟁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전에 괴산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학교에 이상한 시비(詩碑) 몇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학교 교정에 문학비가 있는 것은 학생들의 정서함양이나 조형성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말하기를, 오병익 교장선생님은 자신이 재직하던 중 괴산교육청 장병학 과장과 자신의 문학비(文學碑)가 세워지도록 했으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동문회 등이 문학예술공원을 조성한다면서 문학비를 세운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다. 그는 그게 과연 순수한 의도로 조성되었겠느냐며 작가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조롱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표현론으로 이해를 했다.

문학이론 중 표현론은 인간의 표현욕망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분별심, 수오지심,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이 함부로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문득 시비를 세울 때 두 분의 교장선생님들은 표현욕망과 수오지심이 충돌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하기사, 그냥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형편없는 글을 문학작품이라고 우기면서 문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세상이니 논할 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금석문(金石文)을 세우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때는 신중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일관해야 하고, 가능하면 자신의 생전에는 금석문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조각(彫刻)과 달리 시비(詩碑)라면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시인의 시비를 세워야 한다.

이때의 객관이란 타계한 문인을 말하는 것이거나 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작가의 작품 또는 교과서에 등재될 만한 문인이나 누가 보아도 문제가 없을 만한 작가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며, 이 조건에 맞는다고 하더라도 공공적인 절차를 거쳐서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문학관이나 기념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객관타당성이 없는 문학비나 글씨 등은 언젠가 철거되거나 땅에 묻혀 버린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단도를 직입하자면 오병익, 장병학 두 교장선생님께서 '문인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시비를 철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인품이 고결한 문인이나 문학을 경외하는 작가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는다. 자기 생전에 금석문에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사회적 관습과도 배치되고 교육자의 언행으로써도 적절하지 않다. 교장선생님들께서 어떤 이유를 제시할지 모르지만 썩 잘한 것은 아닌 것 같으므로 자진철거와 같은 지혜로운 판단을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두 분께서 인품이나 교육자적 덕성이 훌륭하신 것으로 알고 있거니와 앞으로도 함부로 문학비를 세우는 등의 허황된 일을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아울러 이기용 교육감께도 여쭌다. 교육감께서는 공적인 장소인 학교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시비가 존치(存置)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답을 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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