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권력
비움의 권력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4.0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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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요즘도 방송사마다 사극 경쟁이 치열하지만 사극이 재미있는 것은 권력의 암투 때문이다. 과거 '용의 눈물'로 대표되는 사극들은 십중팔구 권력의 냉엄함을 부각시키며 보는 이들에게 의도된 흥미를 안긴다. 권력의 변화무쌍함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이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받아들이며 드라마에 저절로 빠져드는 것이다.

권력의 속성은 독점이다. 결코 나눌 수가 없고, 때문에 나누어가지기를 바라는 자는 그게 누구이든 죽여야 하며, 그것도 결정적일 때 무자비하게 짓밟아야 권력의 독점이 확실하다는 것, 이것을 실체적() 사실로 보여주는 것이 대개 사극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이런 독선을 끝까지 방치하지 않는다. 당대에 응징하거나 설령 당사자가 천수를 다하더라도 그 업보가 사후 혹은 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조화를 부렸다. 당장 이성계만 보더라도 쿠데타로 고려왕조를 뒤엎고 왕(王)씨 족의 씨를 말리는 처절한 권력투쟁의 최종 승자가 됐지만 곧바로 2세들의 '왕자의 난'과 왕손들의 골육상잔에 직면하여 인생의 참담함을 곱씹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부관참시는 이런 면에서 아주 극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마호메트임을 자처하던 호기는 어디가고 끝내 시골 토굴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세인이나, 정적을 암살하며 21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두르다 하와이로 쫓겨나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마르코스 역시 오만한 권력의 업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들 때문에 두 나라는 아직도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성공한 권력은 상대에 대한 죽임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껴안을 때 가능했다. 이는 오랫동안 말썽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복지국가를 구현하는 북 유럽 선진국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권력의 속성은 독점만이 아니라. 되레 나눔이나 비움일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지금 국가간 엄청난 괴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비움의 권력'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도 너무나 절실하다.

만약 유인촌 장관이 그들의 시각대로 참여정부 코드라는 인사들을 발길질로 걷어찰게 아니라 역발상으로 대변했다면 어떠했을까. 히틀러의 나팔수 '괴펠스 같은'이라는 수식어의 자리에 '바야흐로 한국문화의 르네상스가 기대된다'는 국민적 설레임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어차피 문화는 한쪽으로만 갈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예상치 않은 장관자리를 꿰차자 마자 비움의 균형보다는 치기(稚氣)의 독선부터 부렸다.

만약 이상득씨가 대통령이 된 동생의 당선이나 취임식에 맞춰 용퇴를 천명했다면 또 어땠을까. 그러했다면 적어도 국민들은 자기 합리화를 강변하는 일그러진 모습의 노추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역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올만한…"이라며 가문의 금도를 칭송했을 것이다. 한데 안타깝게도 지금 많은 국민들은 "두고보자" 심보가 됐다.

만약 삼성 이건희 회장이 검찰 수사 이전에 아름다운 기부를 했다면 이 또한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내놓고도 국민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보증금 5000만원짜리 월세아파트에 살면서 번돈을 고스란히 사회에 기부하는 가수 김장훈과 "베푸는 삶을 통해 인생의 동력을 얻는다"며 장학재단을 만든 최경주만 이 회장과 비교돼 국민적 영웅이 됐다.

비움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창조다. 비움은 남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하는 즐거움이자 자유다.

정권이 바뀌고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눈만 뜨면 "나 밖에 없다"는 살벌한 이기만 난무하는 지금, 너나할 것 없이 너무 욕심만 넘쳐난다. 그 욕심이 권력의 옷까지 입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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