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과연 멋진 신세계일까
과학, 과연 멋진 신세계일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2.2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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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과학은 신화이다. 과학은 순수하고 객관적이어서 진리를 밝혀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무수한 어려움과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학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믿고 싶어 한다. 믿음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언뜻 생각하면 과학을 대신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과학은 참이고 대세라는 상징의 날개까지 달았다. 누가 과학을 비난할까. 누가 과학에 등을 돌릴 것인가.

과학을 신화로 만들었던 열정과 순수함은 한때 정확한 사실이었다. 지금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범위는 좁아졌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던가. 찬탄할 만큼 맑고 검은 눈과 반듯한 이마를 가졌던 소년은 늘 순수한 소년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듯 신화는 언제나 고결한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객관성은 놀라움이었고 믿음이었으며 가능성이었으나 권력과 이윤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권력은 욕망이다. 이윤에 대한 욕망은 열정과 순수함을 그대로 놓아두지 못한다. 그리고 욕망의 추종자들은 쉽게 타락한다. 오늘날 권력이 된, 권력과 타협하거나 자본과 손잡은 과학은 결국 위험한 신화가 되고 말았다. 규모가 큰 과학일수록 그 정도는 심화된다.

끝 모를 기대와 들뜸에서 바닥없는 구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곤두박질하게 했던 황우석이라는 롤러코스트의 기억이 아직도 새롭거니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분야를 다루는 나노공학도 눈에 보이지 않는 타협과 드러나지 않은 위험 때문에 의혹의 눈길을 거두기 어렵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라며 수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는 로봇공학은 로봇에 대한 기술적 제어의 완벽성이 얼마 만큼인지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예상 이득의 폭은 물론이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자본의 내역은 더욱 알기 어렵다. 유사한 영역으로 인간 스스로 기계가 될 수 있다는 연구는 '인간성'이라는 당위마저 의심하게 할 것이다. 또한 아무리 첨단일지라도 막대한 연구비 지원 없이 과학자 그룹의 열정만으로 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운 바에는 인공지능분야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더 큰 비극은 과학도 수단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과학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호흡하고 있는 근대사회의 위대함 때문이다. 근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주체가 되도록 이끌어주었다. 신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은 인간은 정말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중심은 주변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중심이 된 인간, 즉 '나'는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주변으로,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고, 사실 대상화 목록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이 근대사회의 위대함이며 비극이며 역설이다.

규모는 효율과 함께 종속을 낳는다. 이것은 과학의, 과학자의 또 다른 불행이다. 규모가 커지면 역할은 분화되어야 하고, 관리체계가 들어설 수밖에 없다. 역할과 관리체계는 생명체와 같아서 한 번 생겨나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본래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리자는 조력자였으되 거기서 만족하거나 멈추지 않는다.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한순간이다. 과학이나 과학자를 위한 존재였던 관리자는 거꾸로 관리자를 위한 과학과 과학자를 요구한다. 거기에다가 커진 규모는 더 큰 규모를 탐한다. .

그럼에도 여전히 과학은 신화로 남아있다. 누구도 쉽사리 과학에 등을 돌리지 못한다. 대신할 무엇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 차선으로서의 최선일까. 과학에 대한 의심을 아예 거두어버린다면 그러리라 인정하되, 둑을 조금 터 놓는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다. 과학이라는 대세에 조금만이라도 등을 돌려보는 시도는 그래서 버거우면서도 새롭다.

(책 : 제롬 라베츠. 이혜경 역. 과학 멋진 신세계로 가는 지름길인가, 2007. 도서출판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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