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라는 이름의 계급
영어라는 이름의 계급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2.18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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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 승 환 <충북작가회의 회장>

지난주 수요일 새벽 동이 터오는 아침이었다. 내가 '우리동네 김씨'라고 부르는 이발소 주인 김씨가 여섯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추운 길거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발소 주인답지 않게 부스스한 머리의 아버지와 깨끗하게 차려입은 아들이 대조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전후는 생략하겠거니와 그는 영어학원에 보내는 아들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수입이 200만원만 되면 좋겠다는 그였기에 영어학원의 한달 수강료 50원은 '우리동네 김씨'의 생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사연을 묻는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학교 선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냐는 훈계(訓戒)까지 듣게 되었다.

 그의 말인즉, 대통령까지 나서서 영어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판에 가만히 있다가는 아들 역시 하류계층의 노동자가 될 것이니 무슨수를 써서라도 자식의 신분상승을 시켜야 하겠다면서 투쟁의 결기마저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일전에 이발노동보다 더 숭고한 일은 세상에 없으며 이발소 주인보다 높은 신분이 어디 있겠느냐는 내 말에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터였다.

누가 '우리동네 김씨'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영어라는 이름의 계급이다. 영어는 한국사회의 계급과 계층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것을 새삼 깨우친 '우리동네 김씨'가 자녀에게 영어 학습환경을 만들어주려는 것이 바로 '추운날 아들 배웅'이라는 장면인 셈이다.

전문가들이 검증한 것처럼 외국어 습득에는 학습조건과 학습환경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공교육만 가지고도 영어를 잘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급기야 인수위원회 회의를 영어로 해보자라든가, 영어로 수업을 하자는 등의 구체적인 영어사용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이런 변화를 보고 들은 김씨는 학교 교육만으로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을 믿지 않고, 사교육을 통하여 아들의 신분상승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부르디외(P.Bourdieu)는 자본에는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이 있는데 현대사회에서는 문화자본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화자본에는 학력, 언어사용 능력, 예술감상 능력, 소유하고 있는 문화자산, 문화적 인지능력 등이 포함된다. 문화자본은 필요에 따라서 경제자본 즉, 돈으로 환산이 가능하며, 집단과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상류계층은 문화자본을 자녀에게 물려줌으로써 상류계층이라는 신분을 세습(世襲)한다. 당연히 연수나 조기유학 또는 특별한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영어를 잘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부모의 경제자본이 자녀의 문화자본으로 환산(換算)되는 경우로 부당하고 불평등한 사례에 해당한다.

외국어 학습은 단순반복훈련의 성격이 강하고 또 언어사용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데 공교육에서 그런 학습환경을 만들어 주려면 교육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작은 정부와 예산 절감을 목표로 하는 이명박 정부가 과연 그런 투자를 할 것인가 아니다. 결국 사교육이 영어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부모의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세습을 뜻한다.

외국어인 영어가 계급이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민족어인 한국어보다 영어가 중요한 사회 역시 올바른 사회는 아니다. 한국은 한국어라는 문화를 토대로 성립된 국민국가(nation state)다.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정신적으로 한국어(조선어)가 국가를 대신하기도 했다. 물론 세계화의 시대에 영어는 중요하다. 하지만 영어가 곧 계급이 되고 배타적 문화자본이 되며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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