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노의 계절에…
이 분노의 계절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1.31 2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지금은 뜸한 것 같지만, 며칠 후 있을 설처럼 무슨 명절이나 연휴마다 잊을만∼하면 TV에 재방되는 옛 영화가 두편 있다. 미국 작가 존스타인벡 원작의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이다. 방송이 왜 이들 영화를 재탕, 삼탕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개인적으론 그야말로 수십년 동안 숱하게 감상했는데도 볼 때마다 대단한 흥미와 긴장감을 맛본다.

감옥에서 나온 주인공의 고향 행을 위한 히치하이크로 시작되는 '분노의 포도'는 돈 있고 힘 있는 자에게 밀려 농장에서 쫓겨나는 농민과 일꾼들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초기 미국 자본주의의 반인간성을 고발한다. 때문에 이 영화의 시종일관 흐름은 쫓겨나고 박탈당하는 사람들의 분노다.

단 세편의 영화만 남기고 24살에 요절한 반항아, 제임스 딘을 전설적인 배우로 만든 '에덴의 동쪽' 역시 주제는 분노다. 주인공의 반항과 우수에 찬 눈빛이 화면을 압도하는 이 영화는 얼핏 청소년기의 혼란과 방황을 그린 것 같지만 그 본질적 메시지는 '사회로부터 거부당하는 자'의 분노와 고통이다. 결국 제임스 딘은 영화 속의 배역처럼 고속도로에서 분노의 질주를 하다가 짧은 삶을 마감했다.

바야흐로 분노의 계절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새 정부의 조직개편안에 어깃장을 놓겠다며 결기를 바짝 세우고 있고, 한반도 대운하를 놓고 심상치 않게 돌아가던 보수와 진보의 엇박자는 대충돌을 예고하는가 하면, 잠시 움츠러들던 노동계가 아직 출범도 안 한 보수정권을 향해 연일 맞짱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너도 나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겠다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으로 꾸역꾸역 모여 들면서 '만약 내가 안 되면(공천) 두고 보자'식의 살벌한 의기()가 여기저기 난무하고, 수구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예 '인간 노무현'을 의제로 매일 신나게 두들기며 푸닥거리를 즐긴다. 하나같이 분노하거나 분노를 키우고 있다.

의학 심리학에서 분노는 동전의 양면처럼 해석된다. 분노가 물리적인 힘의 최고 상태에서 극단적인 행동의 단초가 되기도 하지만 분노로 촉발되는 교감신경의 흥분은 되레 강심이나 진정의 효과를 수반하기도 한다. 다혈질인 사람이 왕창 열을 받아 흥분하고 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오히려 상대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지는 것은 아마 후자 쪽일 것이다.

맞다! 분노엔 역기능 못지않게 순기능도 많다. 분노할 줄 모르는 인간은 결코 무르익지 못한다. 역사적 혁명이나 변혁도 바로 분노로부터 시작됐다. 포도는 분노해서(익어서) 터져야 신의 선물이라는 포도주로 만들어진다.

끈 떨어진 대통령이라고 해서 지금처럼 인수위와 언론이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며 개패듯 한다면 제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감정을 억누를 재간이 없다. 지금, 노 대통령은 아마 제임스 딘이 삭였던 '사회로부터 거부당하는 자'의 분노를 곱씹는지도 모른다. 떠날 사람에 대한 별리(別離)가 이런 식이라면 그 업보는 5년 후에 반드시 반복된다. 굴절된 역대 정권에서도 초장부터 이런 적은 없었다.

어차피 정권에 대한 사후 평가는 엄정하게 내려진다. 노무현 정권이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업적도 많다. 당장 그 구역질나는 권위주의와 국민의식의 사대주의를 몰아내는 국가적 패러다임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오지 않았는가. 적어도 참여정부에선 이상한 빨갱이 도표를 그려서 무고한 사람들을 때려 족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젠 노무현 대통령도 분노의 끈을 놓아야 한다. 이미 그가 기댔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나고 있고, 지금의 때늦은 결기 또한 국민들에겐 버거움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런 것이 권력이고, 그래서 무상타 하지 않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