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전(展) 유감
빈센트 반 고흐전(展) 유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1.25 22: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

빈센트 반 고흐는 37살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1888년 겨울,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자학내지는 그림에 대한 집념과 고난의 예술 역정은 지금 서슬이 더욱 퍼렇다.

"때때로 너무나도 강렬한 감정에 빠져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 마치 말을 할 때나 편지를 쓸 때 거침없이 단어들이 줄줄 쏟아져 나오듯이 붓놀림이 이루어지곤 한다"는 고흐의 편지글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좋은 수단이 된다.

E.H 곰브리치는 그의 역저 '서양미술사'에서 고흐의 붓놀림에 대해 "고흐가 사용한 붓놀림 하나하나는 단지 색채를 분할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규정한다.

나는 미술관의 도슨트(docent)제도가 마땅치 않다. 베스트셀러가 된 어느 국내 미술가의 '그림 읽어주는 ' 운운하는 교과서식 발상도 좋아하지 않는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불행히도 이번 서울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 밭, 그리고 몇 가지 초상화들은 천연색 복제판으로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가장 흔한 장식 소재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림, 특히 진품을 보는 감동은 사진 복제본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예술작품에는 아우라(Aura)가 있다.

독일 사상가 빌터 벤야민이 예술이론으로 도입한 이 용어는 예술작품에서 개성을 구성하는 계기로,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미묘하고도 개성적인 고유한 본질 같은 것을 의미한다.

복사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우라는 고흐의 붓놀림과 같은 마띠에르(Matiere-불어로 물질이나 재료를 의미하며, 종이 및 캔버스 등 바탕 재질, 붓놀림, 그림의 재료 등이 만들어 내는 화면의 재질감)를 통해 절절하게 다가온다.

붓자국을 통해 전달되는 고흐의 격앙된 심리상태를 도슨트의 설명이나 오디오가이드를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것은 그래서 무리이고, 그런 전시진행 행태는 아무래도 맘에 들지 않는다.

'아를의 반 고흐 방'을 그린 뒤 "오로지 색채만으로 모든 것을 그리고, 색을 단순화시켜 방 안의 모든 물건에 장엄한 양식을 부여하려고 한다. 여기서 색채로 휴식 또는 수면(睡眠)을 암시할 수 있을 거야. 한마디로 말해 이 그림을 보고 두뇌와 상상력이 쉴 수 있도록 말이야"라고 쓴 고흐의 편지글은 도슨트나 오디오가이드에 대한 거부감을 잘 설명한다.

문제는 의식 내지는 사고의 고착화이고 획일화의 강요에 있다.

나는 얼마 전에 세상을 등진 만화쟁이 친구에게 '김문환에게'라는 제목으로 헌시한 바 있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라는 이문세의 독백./ 그 기막힌 살아감의 번민이 절실할 때쯤/ 나는 이미 보수가 되어 있다//(후략)라고 쓴 뒤 '보수'라는 단어에 가슴 저렸던 기억은 세상과의 닫힘과 사고의 경직성에 대한 회한이다.

취학 전 어린이들이 모처럼의 고흐 진품 그림 앞에서 오디오가이드에 모든 두뇌활동을 집중하는 사고의 틀 맞춤.

그 속에서 무한한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미리 알고 정하신 뜻'에 갇혀버리는 아우성을 듣는 듯하다.

'불멸의 화가'로 칭송받는 빈센트 반 고흐의 화가 경력은 불과 10년이 채 못 된다.

그 격정적인 고흐의 10년과 소위 요즘 회자되는 '잃어버린 10년'과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오디오와 비디오, 그리고 활자의 기막힌 정치함이 강요되면서 '보수'가 전부인 세상이 되는 건 아닌지 새 정부가 궁금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