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리더십과 슈퍼맨 대통령
강한 리더십과 슈퍼맨 대통령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1.2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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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지난 21일 아주 재미나는 기사가 일부 중앙지에 실렸다. 바로 전날,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국가산업단지의 전봇대 2개가 5년만에 뽑혔다는 내용이다.

사연은 이렇다. 문제의 전봇대는 이곳 산업단지내의 8차로와 6차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대형트럭 운행에 큰 장애가 됐다. 이 때문에 이를 철거하거나 이설해 달라는 민원이 제기됐지만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한국전력 등 관계기관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무려 5년이나 지체시켰다.

그러던 중 몇 달전 이곳을 방문했던 이명박 당선인이 지난 18일 인수위 간사단회의에서 "대불공단에 가 봤는데 대형트럭이 커브를 트는데 폴(전봇대)이 서 있어 잘 안된다. 그 폴을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안됐다. 아마 지금도 안됐을 것이다"며 이른바 '전봇대 발언'을 하자 이틀만에 급거 뽑혀진 것이다.

전봇대 철거 뿐만 아니라 산자부와 영암군, 한국전력 등의 관계자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애로사항을 듣는다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이곳 관계자들이 헷갈렸다는 후문이다. 이를 두고 몇몇 언론은 이 당선자의 실용주의 및 규제개혁의 상징이라고 추켜세웠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기사를 보고 혀를 끌끌 찼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도 우리나라가 다시 60, 70년대로 돌아가나 착각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묵은 민원을 일거에 해결한 처사는 잘한 일이다. 문제는 그 과정과 방법에 있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대통령이 될 사람의 말 한마디에 그 민원이 해결될 게 아니라 이미 해결됐거나 아니면 관계자들이 5년 동안 피튀기게 설전을 벌인 '안되는 이유'가 갑자기 돌변한 것에 대한 해명이 동반된 철거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날 현장에 경쟁적으로 달려와 허겁지겁 전봇대에 매달린 사람들의 자화상이 머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를 일구고 청계천을 되살린 이명박 당선인의 추진력과 강한 리더십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그를 향해 환호했고 지금,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잔뜩 고무돼 있다.

하지만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적 시각은 여전히 촌스럽다. 예의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슈퍼맨으로 인식하려 하고 있고, 또 기꺼이 그로부터의 시혜(施惠)를 받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심산으로 비쳐지니 말이다.

인수위가 구성되자마자 휴대폰 요금을 대폭 내리고 신불자를 국가 돈으로 구제한다고 했다가 발을 쭉 빼더니, 밤새 별일 없었냐는 인사가 각별하게 들릴만큼 개혁으로 포장된 엄청난 국가 의제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수십년간 지속돼 온 교육정책도 단박에 바꾸겠다고 난리다.

물론 정권이 바뀌면 변화는 불가피하다. 또 그 변화는 살아있는 정권, 즉 집권자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는 임기 초반에 밀어붙여야 가능한 측면도 있다.

그래도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인수위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자치단체가 챙길 일이 따로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 한 사람에 대한 기대감을 너무나, 그것도 원칙과 배알도 없이 높이려는 뿌리깊은 거지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나가다간 노무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국가를 5년 동안이나 물말아 먹은 게 후회스러운게 아니라, 앞으로 닥칠 혼란과 패배감을 더 우려할 판이다.

국가통치가 그렇게 한 사람, 또는 그 추종자들에 의해 무 자르듯 재단되고 그것이 정권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역대 집권자는 모두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흔한 말로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제발 바라는 게 있다.

이젠 좀 진중하고 침착해 지라는 것이다. 품위있는 정치와 통치행위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산에 오르는 이재오의 꽁무니를 좇는 1만명의 그 추한 잔상을 떨쳐 버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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