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亂世)의 영웅
난세(亂世)의 영웅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2.12 23: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현장에 가장 신속하게 나타난 사람들은 다름아닌 대선 후보다. 경쟁적으로 이곳에 와 길어 봤자 한 두시간 내외로 머물다가 총총히 가버렸다. 각종 재난 내지 사고현장은 선거 때 후보들이 단골로 찾는 곳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 자체가 보는 이들에게 선의의 감정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 때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그것이 의도됐든 아니든, 만약 특정 후보가 위기 또는 난관에 처한 사람들과 같이 있게 되면 우선 돋보인다. 일종의 포장된 리더십이다. 한 때 손학규가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장기간 민생투어라는 명목으로 전국 곳곳을 누빈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로 그늘진 곳만을 찾아 다님으로써 이미지의 차별화를 꾀하려 했다.

어차피 선거에 나서는 사람들은 위기감을 조장한다. 그래야 자신의 명분과 입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 지금 대선 후보들도 하나같이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가 어렵다거나 국가정체성이 혼란스럽다거나 아니면 상대후보가 부정부패, 비리의 화신이라는 식으로 혼돈을 부추긴다.

사실 영웅이나 인물은 난세에 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난세엔 영웅 뿐만 아니라 바보, 배신자들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도 영웅만이 강조되어 통설로 내려오고 있는 이유는 왜일까 바로 이것이 올 대선의 키 포인트다.

영웅은 절대로 위기를 피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맞짱뜨거나 극복한다. 마치 이순신이 국가적 누란의 위기에서 패배의식에 빠진 민심을 다독이고 앞장 서서 전쟁을 수행했듯이 말이다. 올 대선은 바로 이런 영웅탄생을 기대하는 국민심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되고 있다. 자발적이든 아니면 야당의 전략적 강요에 의한 것이든, 참여정부에 대한 위기의식이 총체적인 난세로 치부되면서 지금 많은 국민들은 '영웅 탄생'을 바라고 있다.

문제는 이런 영웅이 혜성처럼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들이 악착같이, 아주 고집스럽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후보의 자질이나 국가관은 이미 논외의 대상이 됐다. 오로지 '우리의 영웅이 되어 달라'는 맹신과 주문만 판치고 있다. "후보가 흠이 많아도 더러워서 찍겠다"는 지금의 이 황당한 민심은 어쩌면 대중(大衆), 냉혹하게 말해 우민(愚民)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우민은 평화로울 때는 방임의 자유를 원하지만, 일단 위기가 닥치면 스스로 예속을 원한다. 난세엔 믿고 따를 영웅을 필요로 하지만, 평화를 얻고 나면 오히려 영웅을 불편해 한다. 조석으로 변하는 민심 앞에선 영원한 영웅도, 영원한 군주도 없다. 이는 '군주론'의 명제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을 쓴 저자가 마키아벨리즘으로 공식화돼 권력과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인의 상징이 된 것은 억울한 측면이 크다. 바람에 새털같이 흩날리는 민심을 따라잡으려면 오히려 마키아벨리즘적 사고방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성공한 CEO들의 가장 특징적인 공통점이 강·온전략의 조직관리를 추구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였다, 늦췄다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구성원들을 순치시킨다.

이런 통찰력에 근거한다면 지금의 대선후보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앞날은 결코 순탄치가 않다. 민심은 또 새로움을 찾아 변할 것이다. 게다가 만들어진 영웅은 쉽게 잊혀진다.

그나저나,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태안 어민들은 기름 쓰나미에 신음하고 있는데, 이를 위무해야 할 충청의 의사(擬似) 영웅들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헤맨다. JP는 서산의 붉은 노을은커녕 노추에 취해 있고, 이회창은 대쪽의 기개는 어디 가고 고리타분한 지역주의의 향수에 매몰돼 있다. 이인제 심대평의 역할은 여전히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런 난세에 후세에라도 충청의 영웅으로 기억되려면 쪽팔리게(?) 적장의 밑으로 기어 들어가지 말고 끝까지 장렬하게 싸워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