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은 가능하다!
'타임머신'은 가능하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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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칼럼
김 남 균 <민주노총충북본부 前 사무처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91년 11월 어느날, 나를 비롯한 일군의 무리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이리저리 서울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사방은 전경들로 가득차 있었다. 빨간 손수건을 손목에 두른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침묵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남의 집 옥상에서 빗물에 '찌지직' 거리는 전기줄 사이를 뛰어넘기도 했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의 침묵의 행군 끝에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우렁찬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것이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접해본 16년 전의 '전국노동자대회'였다. 비록 군사독재정권 말기였지만, 그래도 '군사독재정권'인 법!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금기였던 때, 노동자들은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91년 그해는 유난했다. 내 동갑내기인 강경대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4월 29일 '노태우는 물러가라'는 육성을 남긴 전남대생 박승희씨 분신, 집회에서 질식사했던 김귀정. 군사독재정권에 항의했던 많은 사람들의 분신이 이어졌던 91년 5월은 정말로 유난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조차도 밀가루와 계란으로 범벅이 된 정원식(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가!)의 등장앞에서 패륜과 '죽음'의 더러운 굿판으로 몰린것까지도 유난했다.

이 모든 것들이 거름이 되고 햇살이 되어 우리의 민주주의는 커졌다.

그렇게 확장되고 커져가는 민주주의와 함께 16년이 흘렀다. 그런데 내 앞에 '민주주의'는 존재하는가!

시계는 거꾸로 흘러갔는 지, 우리 노동자와 농민에게 '서울'을 향한 여정은 여전히 멀고, 험난한 곳이었다. 여전히 경찰의 눈을 피해야 했고, 그래서 뻥 뚫린 4차로, 6차로 고속도로를 뒤로하고, 국도만 따라서 3시간 넘게 돌아서 가야했다. 농민들은 동네에서 막히고, '씨×놈들! 권총가져와! 다 쏴 죽여버려!'라는 경찰의 외마디 고함을 들어야 했다.

91년도 유난했지만, 올해도 유난하다. '한·미FTA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씨, 가난한 노점상들 대한 강제철거에 항의하며 분신한 이근재씨, 전기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나쁜 사업주의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한 정해진씨.

노동자나 농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자체가 죄가 되고 불온시 되는 것도, 나라님을 향해서 자신들의 몸뚱아리를 태우는 민초들의 아우성도 어찌 군사독재정권의 그때와 왜이리도 유사한가.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는 안돼도 회장님의 아들은 회장님으로 승계되고, 가난한 자의 아들은 가난한 자의 아들로 확실히 승계된다. 군사독재정권은 물러나고, 그 군사독재정권에 맞섰던 사람이 정권을 잡아도 하는 짓거리는 똑같이 승계되는 사회.

어릴적에 '타임머신'의 실제를 두고서 이러쿵, 저러쿵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명토박을수 있겠다. "'타임머신'은 가능하다! 왜냐고! 한 번 봐바! 우리가 지금 노태우정권 밑에서 살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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