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손
친구의 손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4.03.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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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가끔, 어느 날 문득 전화가 온다. 딸들 나이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나는 어느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지, 친구는 어떤 식당을 내어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몇 년간의 삶을 설명하느라 통화는 매번 길어진다.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아코디언플리츠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접혔다 늘어났다 하며 오간다. 언제가 될지도 모를 만남을 기약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대여섯 동네 소꿉친구 중에서도 친구와 나는 학교나 동네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단짝'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항상 붙어 지냈고 키도 몸집도 비슷하여 쌍둥이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하얀 계란형 얼굴에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코, 매끈하게 빛나던 이마를 가진 예쁜 내 친구가 내게 부러워하는 게 하나 있었으니 내 작은 손과 얌전하게 생긴 발이었다. 모 탤런트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예쁘장한 얼굴과 몸매에는 어울리지 않게 손과 발이 엄청나게 크고 넓적했기 때문에 자신은 일복이 많다고 어른같이 말하곤 했다.

우리가 중학생이 될 즈음 충주댐이 거의 완공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로 간 친구는 방학 때면 나를 만나러 오기도 했는데 그도 점차 뜸해졌다. 사십여 년간 실제 만남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듣는 목소리만으로도 각인된 새끼 오리들처럼 `단짝'이라는 단어로 바로 연결된다.

이번엔 내가 먼저 텔레파시를 보낸 것 같다. 내가 친구를 떠올리자 전화가 왔으니까. 또다시 딸들의 근황을 묻고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서로 보고하고 옛날을 조금 떠올리고 언젠가 있을 만남을 약속하며 제법 긴 통화를 마쳤다. 엄청나게 먼 것도 아닌데 왜 좀 더 자주 만나지 않았을까? 어려서는 미처 찾아갈 엄두를 못 냈고 이후에는 점점 달라지는 서로의 길을 낱낱이 알고 가기에는 각자 삶이 분주했다.

마침 동행하겠다는 소꿉친구 J와 함께 얼마 전 새로 시작했다는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아담한 식당 안에 들어섰을 때 손님이 좀 있었다. 주방에서 한창 분주한 친구와 눈인사만 하고 키오스크에서 칼국수 두 개를 주문하고 번호표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한참 후 칼국수를 들고 온 친구가 잠시 자리에 앉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친구의 얼굴은 주방의 열기로 발갛다. 그 곱던 얼굴…. 나는 친구가 만들어준 칼국수 한 그릇을 그 어느 때보다 깨끗이 비웠다. 주방으로, 손님에게로, 내게로 오가느라 분주하면서도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 다행히 씩씩한 목소리다. 손님들이 하나둘 계속 들어온다. “목 좋은 데 가게를 열었으니 잘 될거야” 하며 이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내내 J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슴에만 담아두었던 아픈 기억들과 그동안 창피하게 여겼던 실수와 실패에 대해서도 이제는 조금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옛날 산골짜기에 살던 꼬맹이들이 세상으로 나와 각자 `자기 앞의 생'을 얼마나 애쓰며 살아왔을지 그 하나하나의 삶을 좀 더 따스하게 헤아려 보았다.

어느새 차창 밖 서쪽 하늘이 붉다. 어느 날엔 마흔네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다는 어린 왕자가 생각난다.

`그렇게도 슬플 때는 해가 저무는 게 보고 싶지.'

붉게 빛나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늑하게 위로받는 거 같다. 지구의 모든 생명을 안아주며 오늘 하루도 참 애썼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나도 노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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