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분은 내가 정하는 것
내 기분은 내가 정하는 것
  • 정정옥 수필가
  • 승인 2024.03.2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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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정옥 수필가
정정옥 수필가

 

집 수리를 하려면 베란다의 짐부터 치워야 했다. 그래야 방에 있는 살림들을 쌓아둘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들을 가려내느라 베란다 한쪽을 차지한 신발 상자들을 열어 보았다.

`어머! 이 구두가 아직 있었네' 새것이나 다름없는 까만색 하이힐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신발이라 최대한 아껴가며 특별한 날에나 신던 구두였다. 몇 년 전 난감한 일을 당하고 하이힐 종류의 신발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반갑기도 하고 왠지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외모와 마음의 상관관계는 별개인 까닭에 어울리지 않게도 이따금 잠자리 날개 같은 치마를 입고 싶은 날이 있었다. 거기에 끝이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도도하게 걷고 싶었다.

그날은 겨울의 끝자락이었고 눈이 온 뒤 비가 내렸다. 날씨가 궂으니 괜히 스무 살 그날처럼 싱숭생숭해졌다. 마침 시내에 볼일이 있어 아주 오랜만에 비즈 장식이 달린 주름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외출을 했다. 점점 안 좋아지는 허리 때문에 굽이 높은 신발을 자제하고 있던 터였다.

국민은행 사거리쯤 갔을까.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길은 온통 미끄럼판이었고 허리도 아픈 데다 하이힐까지 신었으니 의지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와야 했다. 날씨가 좋았어도 하이힐은 무리였던 것이다. 집하고 가까운 거리라 택시를 타기도 민망해서 삐딱빼딱 젖버듬하게 겨우겨우 집으로 왔다.

꼴불견 내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흘끔거렸을지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여자로서 하고 싶은 것들 따위는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 굽이 높은 신발들을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몇 번 신지 않아서 새것이나 다름없는 신발들도 아깝지만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낡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기 미안하다 싶은 것들은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고 깨끗한 것들은 아파트 재활용 통에 넣었다.

그날 내 기분이 슬펐는지,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담담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날 이후로 하이힐과는 완전히 작별을 했다. 한때는 기분전환에 특효약이나 다름없던 신발들이었지만.

20년 넘게 친목을 다져온 이웃들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가정을 꾸리고부터 만나면 휴대폰에 저장된 손자 손녀들 자랑으로 떠들썩한 분위기다. 결혼 후 희귀 난치병을 앓느라 아기는 꿈도 못 꾸는 딸을 둔 나는 어느 날부턴가 그 모임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이 모임을 그만둘까 고민을 하게 된다.

집수리가 끝나고 베란다에 남아있던 하이힐 한 켤레를 신발장 한쪽에 정갈하게 넣어 두었다. 이제는 그림의 떡이 되었을망정 내 꽃시절 한때를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이웃들과의 만남도 꽃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옥계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갔었다. 아이들은 물놀이에 신나고 어른들은 파도에 밀려온 바지락을 줍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날의 추억은 지금도 다정한 풍경화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한 느낌으로 마음이 따스해진다. 신을 수 없는 하이힐도, 조금은 서먹한 이웃들도, 꽃시절 한때로 간직해야겠다. 내 기분은 내가 정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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