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진달래
할아버지의 진달래
  • 이연 꽃차소물리에
  • 승인 2024.03.1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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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이연 꽃차소물리에
이연 꽃차소물리에

 

햇살이 제법 따듯해지고 있다. 봄이 바짝 다가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봄의 전령을 만나기 위해 공원 양지쪽에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봄까치꽃이 피어나고 있다. 이제부터 봄은 하루가 다르게 성큼성큼 다가와 모두의 곁에 머물고 산에는 진달래를 비롯하여 세상은 봄꽃들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연례행사처럼 “애야. 뒷동산에 올라가 활짝 핀 참꽃 한 가지만 꺾어 오너라” 하셨다.

처음에는 꽃이 예뻐서 그러는 줄 알았다. 평생 허울뿐인 양반으로 사셨던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엄하고 무섭기만 했던 분이었다. …

그런 분도 꽃은 좋아하시나 보다 신기해서 뒷동산에 뛰어 올라가 할아버지가 참꽃이라 부르는 진달래꽃을 한 아름씩 꺾어다 드리면 아름의 꽃 중에 더도 말고 딱 한 가지만 골라내어 꽃잎을 땄다.

그리고 천천히 씹어 맛을 보신 후에는 “올해는 풍년이 들겠구나” 또 어느 해는 흉년이 올 수도 있겠다며 어두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진달래꽃을 가지고 해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어김없이 진달래 한 아름을 할아버지에게 내밀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꽃을 잡숴보면 풍년인지 흉년인지 알 수 있어유?” 꽃이 달면 흉년이고 꽃이 써야 풍년이 든다는 할아버지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런 거냐며 되물었다.

“흉년이 들면 곡식이 부족해지니 다른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며 살아가라고 세상 만물이 조화를 부리는 거란다.” 세상 만물이 조화를 부려 꽃 맛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며 맛에 따라 풍년도 들고 흉년도 들 수도 있다니 나는 왠지 그 말이 무서워 충격을 받았다. 이듬해 나는 할아버지께 진달래꽃을 꺾어다 드리지 않았다.

봄이면 흔하고 정겹게 볼 수 있는 꽃이 진달래다. 시골에서 산과 들로 쏘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진달래꽃을 한 아름씩 꺾어 책상에 두고 낭만에 젖어 보기도 했을 것이고, 더러는 배가 고파 허기를 달래려고 꽃잎을 따 먹고 배탈이 나 고생했노라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달큼하고 쌉싸래한 맛을 기억하며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 산야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진달래꽃의 꽃잎은 유난히 보드랍고 여리다. 그런 꽃잎을 차로 만드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팬의 적당한 온도를 찾아 꽃잎 하나하나 겹치지 않게 올려야 한다. 잠시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된다. 꽃잎이 타지 않도록 집게로 뒤집어 가며 향 매김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로 재탄생한 진달래 꽃차는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 유리 다관에서 분홍 꽃잎이 너울거린다. 봄날 화전과 두견주로 담가 마시기도 하지만 진달래꽃은 꽃차로서 효용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기관지 질환인 기침, 가래, 천식에 효과가 있는데 차로 우려 마셨을 때 효과는 두 배가 된다. 꽃차 맛은 처음에는 별맛이 없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보면 어린 시절 꽃잎 한 송이 잎 안에 넣고 씹을 때처럼 달큼하고 쌉싸래한 맛이 입안 가득 아련하게 퍼진다.

진달래꽃처럼 모두에게 정겹고 추억이 가득한 꽃으로 차를 덖으면 차의 향기는 어떠한 언어로도 형용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각자의 추억과 설렘 어쩌면 기억하기 싫은 아픔까지 덧댄 향기가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진달래꽃으로 한 해 농사 길흉을 가늠하던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 세상 만물이 조화를 부린다는 자연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니 그제야 할아버지의 행동과 뜻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차 한 모금을 입안에 담고 눈을 감는다. 고향 뒷동산에 진달래 한 아름 안고 있는 아이가 흐드러진 진달래꽃밭 속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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