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는 것들
포기를 모르는 것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4.03.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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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매년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연속의 반복이다.

꽃샘추위에 진즉 달았던 몽우리가 얼었을까 걱정했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려 더 부풀었다. 얼어서 부피가 커진 것은 아니다. 개수를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을 더 살지 않았던가? 확연하게 굵어진 것도 아니니, 꽃의 숫자만이라도 늘려야 되지 않을까 싶었나 보다.

숫자로 존재감을 얼마만큼 드러낼지는 꽃이 피어봐야 알 것이다. 그래본들, 늘 그렇듯, 늘 수줍음에 볼 빨간 사춘기 `명자'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은 줄기 부분이 굵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줄기 중심의 한 점에 가까운 원이 반복적으로 늘어나며 보이는 현상이다.

굵어지면서 뿌리는 아래로, 가지는 위로 자란다. 자란다는데는 분명, 길이뿐만 아니라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포함한다. 처음에 몇 가닥 안 되던 숫자가 얼마 안 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가지는 뿌리가 뻗는 반대 방향을 향해 내달으면서도 같은 면적을 유지하려 한다. 줄기는 뿌리와 가지의 성장을 이어주는 중심 연결체가 된다. 뿌리가 늘어나는 만큼 가지가 늘어나기에, 그만큼 줄기는 더 굵어질 수밖에 없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꽃망울 수가 많아졌다는 것은 꽃눈을 갖는 가지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꾸짖는다고 변할 리 없는, 굵어지는 데는 워낙 더딘 녀석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뿌리를 통해 사방으로 숫자를 늘리는 데 힘을 쓴다. 꽃을 반복적으로 피우면서 땅속뿌리로는 사방으로 확장을, 성장을 꾀하는 야무진 녀석이다.

지난해에 비해 튤립의 숫자가 늘었다. 장마철 전에 캐서 가을에 심는 추식구근인데, 캐지 않고 노지에 그대로 두었다.

알뿌리 하나에 줄기 한 포기가 올라오던 튤립이 올해는 무더기가 되었다. 세어보아도 어렴풋이 십여 개 이상일 듯하다.

꽃을 피웠을 때나 눈길을 끌까, 지고 나면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주체적 상황으로 나름 부단한 노력을 했을 터이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성장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레 증식된 것이고, 분명 비가 많이 와서 물렀을 수도 있고, 다른 작물을 심고 뽑아내며 헤쳐지고 드러났을 터인데, 어떤 알뿌리 하나 밖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 알아서 더 깊이 들어간 건 아닐 터이고. 이런 정도라면 옆자리의 상사화와 경쟁을 해야 할 것인데,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올해 꽃을 피워봐야 알 일이겠지만, 나름의 영역을 갖도록 해줘야 할 듯하다.

땅속의 튤립은 반복적 복사를 통해 부단히 성장했기에 앞으로도 자멸할 일 없는 번식의 속도를 늦추지 않을 듯하다.

자연의 섭리, 순리대로 그저 양분을 빨아들이고, 증식하며, 번식하는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종과 수, 무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번식 조건과 상황에 따라 이동한다는 이야기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번식은, 단순 복사적 개념에 의한 것은 아닌 듯하다. 나름의 경쟁과 어울림, 공존, 공생의 관계성이 있다. 어디에 집중적으로 힘을 줘야 할 강박 없이 오로지 현존의 실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는 포기란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상황이 맞지 않아 죽을 수는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더 많은 꽃을, 열매를, 자구를 만들어 낸다. 모체가 죽기 전, 포기를 모르는 생존의 유전자는 벌써 온 세상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형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대로 증식, 번식하고 있다는 것,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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