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는 날
봄비 오는 날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4.02.2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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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2월의 끝자락에 며칠째 지루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기온이 내려가면 눈이 날리는 하늘은 잿빛으로 낮에 내려앉아 먹을 갈고, 먹구름은 느린 대기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다시 봄이다.

마당 한쪽에서 수줍은 표정으로 매화가 꽃봉오리를 가지마다 매달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고뇌와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다. 추위와 상처와 어둠을 견디고 생명을, 희망을 말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고목에도 싹이 돋아나듯 봄이 환해질수록 추레해지는 나이 든 여인네의 마음에도 봄바람은 불어온다.

짓궂은 바람은 그냥 집에만 앉아 있지 말라고 일탈을 충동질한다.

며칠 전 아들에게 명절 용돈을 과하게 받았다는 문우가 밥 산다고 만나자고 했으나 무엇보다 궂은 비 내리는 날 외출하는데 순해진 바람 때문이라는 핑계가 더 크게 작용했다.

우리를 초대한 문우는 세련된 멋쟁이면서도 묵은지처럼 깊은 맛이 우러나는 사람이다.

글도 잘 쓰지만 입담도 좋고 유머도 넘친다. 매사 긍정적이고 문제해결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

무언가 매듭이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길 때마다 마주 앉으면 어려운 일도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애를 태운 것이 억울하기도 하다.

작년부터 들꽃에 빠져 여기저기 꽃을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글을 쓰는 또 다른 문우는 만나자마자 꽃 이야기부터 한다.

찻집에서도 장식해 놓은 생화를 핸드폰에 담느라 온통 마음이 꽃에 가 있는 그녀는 오래전 혼자가 되었다.

저토록 꽃에 빠져 있는 것은 어쩌면 지는 꽃잎 받아 들고 그 꽃잎을 놓아주고 싶은 손이 가까이 없어 애가 타서이리라.

그럴 때마다 세상의 시계들이 조금 늦게 가서 그 꽃잎이 그리움의 문전으로 시들기 전에 닿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없다는 것은 그렇게 외로운 일이다. 올봄에는 나도 그녀처럼 꽃을 눈여겨보고 하나쯤은 가슴에 고이 담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성품도 다르지만 모나지 않아서 좋다.

대화의 주제가 바뀔 때마다 심각해지기도 하고 웃음을 참지 못해 소녀처럼 까르르 웃기도 한다.

찻집의 유리창 넘어 거리에 비가 와도 좋고 가끔 눈발이 날려도 상관없다.

그 시간만큼은 우리도 하나의 왁자한 풍경이 될 수 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앞날을 확신할 수 없을 때면 좋은 사람들과 풍랑이 잠든 바다처럼 평안하게 앉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삶에 커다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싫어도 좋아도 봄은 어김없이 만난다. 그러나 사람과의 만남은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이뤄진다.

좋은 만남은 원함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선택으로 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택되어 수시로 만나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배려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봄의 문전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새 문 여는 소리로 온통 분주할 것이다.

시새운 바람이 몇 번쯤 지나가도 꽃은 필 테고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은 그만큼 더 붉어질 터, 피고 지는 꽃들로 봄은 한층 붉어져 영글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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