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속임
눈속임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4.02.2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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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비싸서 쳐다보지도 않던 딸기를 한팩 샀다. 유독 딸기를 좋아하는 손녀딸 때문이었다. 손녀딸은 스티로폼에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는 위 칸의 크고 빨간 딸기를 한 알도 남김없이 먹고는 만족한 얼굴로 물러났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나도 비싼 딸기 좀 먹어볼까나?' 아래 칸의 다소 작은 딸기를 씻어 베어 물다가 나는 그만 딸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위 칸의 딸기에서는 나지 않던 석유 냄새가 역하게 났기 때문이다. 다음 것을 먹어봐도 역시 역겨운 기름 냄새가 났다. 취급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칸에 감춰줘 있던 기름 냄새 나는 딸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상했다.

지인 중에 딸기 농장을 하는 이가 있다. 손가락이 굽도록 농사일을 해서 자식들 모두 공부시키고 이제 돈 걱정은 안하고 살게 되었다. 남은 인생 즐겁게 사는 일만 남았다고 좋아하더니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큰 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쁜 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침울해 하던 지인은 잘못한 일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고 고해성사 하듯 말했다. 딸기를 팔 때 속박이를 해서 팔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눈속임해서 판 딸기가 셀 수도 없이 많을 거라며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것 같다고 했다. 나이들어 자연스레 생긴 병이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지인은 오랜기간 자책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와서야 고백하지만 나도 국민학교 시절 일생일대의 눈속임을 한 적이 있다. 열자리 수 이상이나 떨어진 성적표를 칼로 살살 긁어 위조를 한 것이다. 엄마의 낙심하는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워서 저지른 사기행각이었지만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성적표를 내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칼로 긁은 자리가 표시가 났을 법도 한데 부모님은 별 의심 없이 잘 속아 넘어가 주셨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나는 다시는 성적표에 손을 대지 않았다. 회초리 몇 대 맞고 야단을 듣는 게 났지 들킬까봐 벌벌 떠는 그 숨 막히는 순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겁 많은 성격 탓에 내 범죄행각은 한 번에 그치고 말았지만 겁 없는 성격이었다면 몇 번의 위조를 더 했을 것이다.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죄의식도 줄어들었을 것이고 수법도 점점 대담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친구들 중에는 성적표 위조를 습관적으로 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1980년대를 다룬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모든 장면이 인상적이었지만 친정엄마가 올라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가난한 딸의 눈속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웃집 연탄과 쌀을 빌려다 연탄광과 쌀독을 채우고 이웃집 아낙의 좋은 옷을 빌려 입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딸, 이쯤이면 친정엄마가 남편도 없이 혼자 사는 딸의 걱정은 안 할 거라는 생각에서 지은 미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할꼬. 빨랫줄에 걸린 낡은 빨래를 보고 친정엄마는 딸의 어려운 사정을 눈치챘으니…. 비상금을 탈탈 털어 딸 몰래 놓고 간 친정엄마. 엄마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이 가슴 아파서 눈물짓던 딸.

누군들 눈속임 한 번 없이 살았겠는가? 몇 십년을 딸기 속박이를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의 지인도, 친정엄마에게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드라마 속의 아낙도 넉넉지 않은 삶을 살아내는 우리네의 진짜 모습인 것을…. 그

렇다고 오염되어 먹을 수 없는 음식까지 눈속임으로 팔아서야 되겠냐고 마음속으로 웅변을 하며 모처럼 산 비싼 딸기를 음식물쓰레기에 쏟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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