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작은 손이 움켜진 희망
너의 작은 손이 움켜진 희망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4.02.18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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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퇴근길,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기에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파트 현관에서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우편함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관리비 고지서. 매달 이맘때쯤이면 늘 만나는데도 이 만남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긴, 돈 내라는 연락이 누군들 반가울까. 씁쓸한 마음으로 고지서를 펴보니 생각보다 금액이 높지 않다. 게다가 작년 이맘때쯤 관리비와 비교해 보니 거의 10만원에 달하는 돈이 적게 청구된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인가, 어떤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일단 내가 내야 할 돈이 적으니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가방을 놓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득, 이번 달 관리비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왜냐하면 올해 겨울에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난방을 많이 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의 특성상 주택이나 빌라보다 기본온도가 높기도 하고, 아이들이 이제 영유아가 아니기 때문에 따뜻한 수면 잠옷을 입히면 춥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제외하고도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올해 겨울은 따뜻했다. 곧 다가올 봄처럼 따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년 겨울 대비 큰 추위가 지속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기후 위기, 기후 위기 참 많이 듣고 보았지만, 그 경각심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참에 관리비 고지서가 다시 한번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했다.

평소와는 다른 복잡한 마음으로 유치원의 호출기로 아이의 이름을 말하고 기다렸다. 오늘도 아이는 자기 반에서 가장 늦게 하원을 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저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간식을 가지고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나에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늘 그랬듯 자신이 돌봄 시간에 재활용품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집에서 보여주겠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환경교육을 철저히 받은 탓에 아이는 집에서도 요구르트를 다 마시고 나면 나에게 꼭 씻어서 말려달라고 당부하고, 휴지 심이 나오면 다 제 것이라고 욕심을 내기도 한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환경을 되살리기 위해, 지금의 아이들이 재활용품을 자신들의 놀이도구로, 혹은 만들기 재료로 쓰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진 이 현실에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어차피 기성세대들은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길기에, 그 누구도 아닌 너희들 자신들의 삶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며 너무도 당연한 듯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나에게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한 후 분주히 가방에서 무언가를 잔뜩 꺼냈다. 눈을 뜨니 요구르트병으로 만든 마라카스, 망치, 과자 곽으로 만든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난감, 친구들의 이름과 숫자로 가득 찬 이면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이가 이 모든 걸 만들면서 “내가 환경을 지켜야 해!” “지금 지구 온도가 너무 높아져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와 같은 심오한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선생님이 환경이 많이 오염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재활용품을 가지고 활동을 하면 지구가 고마워할 거라고 가르쳤을 때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마친 아이가 “나 잘했어?” 하며 품에 쏙 안겼다. 자연스럽게 맞잡은 아이와 나의 손을 보며 이 작은 손이 잡고 있는 가느다란 희망을 나의 이 큰손으로 싹둑 잘라내지 않기를 마음 깊이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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