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스러진 강
별빛 스러진 강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4.02.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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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이른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4시다. 다급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다. 한동안 큰 시누이의 흐느낌이 들려오고 작은 조카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한동안 멍했다. 제주에서 서둘러 육지로 갔다.

아들만 둘로 작은 아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였다. 어려서는 집에서 엄마가 돌보았지만 크면서 산만하고 폭력성까지 있어 제어할 수가 없었다. 피치 못해 시설로 보냈다. 한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끝내는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작은 조카는 시누이의 아프디아픈 손가락이다. 보낼 곳을 찾느라 집에서 두 달을 데리고 있는 동안 시누이와 시매부는 병이 났고 큰 조카는 직장에 지장이 생겼다.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마지막 보루인 정신병원에 보냈다. 그렇게 시누이는 평생 내내 가슴을 앓았다.

거기서 1년을 보냈다. 42살의 젊은 나이에 생의 마감이 안타깝고 애처롭다. 가족과 본인의 삶이 어디 제대로의 삶이었으랴. 다섯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얼마나 더 아픈 손가락이었을까. 나는 안다. 시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무던히 담금질했음을.

남편 잃은 아내를 과부라고 부른다. 또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이고 부모를 잃은 자식은 고아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를 일컫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너무도 슬픈 감정이라 말로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신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오죽하면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라고 했을까.

동진의 군주 환온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였다. 어떤 병사가 별생각 없이 새끼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태웠다. 어미 원숭이는 슬피 울며 쫓아왔다. 기어코 백 리를 더 가서 배가 강기슭에 닿았을 때 어미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어미 원숭이가 죽은 이유를 이상하게 여긴 병사가 배를 갈라보았다고 한다. 너무나 애통했던 나머지 창자가 모두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육지에서 제주로 건너오면 나는 이방인이 된다. 모든 게 낯설고 신기하다. 제주도의 밤바다엔 수많은 별이 뜬다. 수평선을 수놓은 찬란한 불빛을 처음 보았을 때 예뻐서 탄성을 질렀다. 어선에서 물고기를 유인하기 위해 밝히는 불빛임을 알았다. 이 등은 집어등(集魚等)이다. 생업을 위해 어부들이 켠 등임을 알고부터 등명(燈明)으로 보인다. 어질한 황홀은 기도로 바뀐다.

새벽녘 잠에서 깼다. 커튼을 올리니 하늘이 들어온다. 하현달 아래 바투 붙어 샛별이 반짝이고 있다. 달을 졸졸대는 샛별은 볼 때마다 엄마를 붙어 다니는 아기 같아 안쓰럽고 애틋하다. 샛별에 아들의 모습이 겹친다. 흐린 날에도 마음에 뜨는 별이다. 작은 조카 생각에 짠하다. “부디 좋은 곳에서 아프지 않고, 자유롭고 새로운 세상에서 영면하길”

시누이가 바라다보았을 마음이 아팠던 샛별은 사그라졌다. 참척(慘慽). 깊은 상실의 고통은 유리 조각에 찔리는 통증에 비하랴. 그녀의 심연에 슬픔이 길을 내어 강으로 흐른다. 별빛이 스러진 강에선 우렁우렁 울음소리를 낸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거센 파도가 날카로운 비늘을 고추 세워 달려들고 있다. 나는 안타까운 숙명 앞에 눈을 꼭 감는다. 부디 시간의 힘이 이 바람을 잠재우기를 빌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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