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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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4.02.0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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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배우의 술 취한 연기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맨정신일 텐데.

각각 다른 배역을 매번 훌륭히 소화해내는 배우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서라지만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해 보는 직업이 한편 부럽기도 하다. 특히 수많은 인생을 살아 본다는 게 가장 탐나는 점이다.

드라마 속 술 취한 회장님은 사실 중간에 배역이 바뀌었다. 원래 배우가 도중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얼마 간은 고인의 촬영분으로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눈앞에서 열연하는 배우가 이미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 느낌은 왠지 해가 지고 나서 번지는 노을 같은 무엇이었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오래전에 잠깐 도서관에서 사진 기초반에 다닌 적이 있다.

한번은 단체로 새벽 출사를 나갔는데 아쉽게도 나는 동참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라 내 맘대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가고 싶었다. 사진이 찍고 싶었던 건 아니다. 출사를 나가면 무조건 인생샷 찍는다는 보장도 없는 거고,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 주제에는 사실 언감생심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과 세 아이 치다꺼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해 뜨길 기다리는 일도 한 번쯤 해 보고 싶었겠지.

운 좋게 일출 사진도 찍을 수 있으면 찍어보고 싶었을 테고. 아니면 강태공이 무념무상 찌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세월을 낚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앉아 있는 시간이 절실했었는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떠나는 회원들이 부러웠었다.

나도 언젠가는 꼭 새벽 출사를 나가리라 속다짐하며 그날은 공상으로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만약 빛의 속도보다 빠른 자동차가 있어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얼른 출사에 합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든가 `여기가 어린 왕자가 사는 행성이라면 의자를 당겨 몇 번이고 일출을 볼 수 있을 텐데' 뭐 그런.

어쨌든, 그때 갈라진 꿈과의 거리는 하루하루 점점 더 벌어져 문득 돌아보니 숲으로 덮여 뵈지 않게 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되어 있었다.

사진작가들에게는 셔터를 누를 최적의 시간이 있다고 한다. 해가 뜨고 질 때 아주 잠깐 피사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를 매직아워라고 부른다. 빛과 어둠의 양이 똑같아지는 순간, 빛과 어둠이 완벽하게 공존하는 그 순간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빛도 어둠도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는 그 마법의 시간엔 그래서 오로지 본래의 아름다움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내 생각에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두 번의 매직아워를 경험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한번은 언제쯤이 될까?

요즘 난 생애 최고의 황홀한 출사를 꿈꾼다. 떠나갈 세상과 맞이할 세상이 정확하게 겹쳐지는 그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겠다는 소망이 있다.

이 세상은 아니고 그렇다고 저세상도 아닌 무(無)의 세계, 두 세상이 맞닿아 이어지는 찰나에 내 두 번째 매직아워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아무런 에고ego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그 경이로운 시간 안에서 단지 존재 자체인 나를 알아채고 싶다면 이것도 아직은 언감생심일는지.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남은 날 동안 나는 일단 내 유일한 배역을 혼신의 연기로 살아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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