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성지
배티성지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4.01.3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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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국장(진천주재)
공진희 부국장(진천주재)

 

풀숲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젖히는 와그락와그락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씨근씨근하는 그들의 숨소리까지 드디어 옆에 들린다.

“야! 이년 여기 있다!” 하는 벽력 같은 소리가 금방 등줄기를 내려 갈기는 듯하다.

`될 대로 되어라.' 데레사는 눈을 꽉 감은 그대로 성모패만 부서져라 하고 더욱 힘을 주어 꼭 쥔다.

데레사는 이제 꼭 이 사람들의 손에 붙잡히는 것이라고 느껴 가슴까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데 대체 웬일인지 양가와 포졸들은 데레사가 숨어 있는 솔포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 산 위쪽으로만 두리번거리며 올라간다. (윤의병 / `은화' 중에서)

소설 은화(隱花)는 윤의병 신부가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39년부터 `경향잡지'에 연재한 박해소설이다.

순교자의 후손인 저자가 선교사들의 서한과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박해시대의 신자생활을 직접 취재하여 엮었기 때문에 내용은 허구가 아닌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윤의병(바오로) 신부는 1889년 안성시 청룡마을에서 태어나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용진골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일대가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됐다.

소설 은화의 주무대는 배티성지 인근이다.

천주교는 한국 천주교 대표 성지 가운데 하나인 이곳을 최양업 신부님과 선교사들의 사목활동 거점,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 박해시대의 교우촌, 순교자들의 본향으로 소개하고 있다.

배티는 순 우리말로 `배나무 고개'라는 뜻이다. 진천에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이곳의 고개 주변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표기한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 신부가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한 뒤 배티 교우촌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여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이 초가집은 성당 겸 사제관이자 신학생들의 기숙사 역할도 했다. 1853년 여름부터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이 초가집에 살면서 전국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한편 틈틈이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천주교인들은 척박한 산간지대로 들어가 몸을 숨긴 채 살아갔다. 그 시절 백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밀 교우촌이 점점 커지면서 기록에 그 이름이 보이는 교우촌만 해도 배티·삼박골·은골을 비롯하여 정삼이골·용진골·절골·지구머리·동골·지장골·발래기·퉁점, 조금 떨어진 원동·새울·굴티·방축골 등 15곳이나 된다.

계속된 박해로 배티와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다.

백곡 공소의 박바르바라와 시누이 윤바르바라 의 묘, 복자 오반지(바오로), 삼박골 모녀 순교자의 묘, 그리고 무명 순교자 14인의 묘 등 배티 인근에는 유·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만 34명이다.

천주교 박해기의 교우촌을 한국의 카타콤이라고 한다.

카타콤은 2세기부터 유래하는 유태인과 기독교도의 고대 지하 무덤이다.

그런데 배티의 비밀 교우촌은 산길을 타고 비밀통로로 이어져 관군이 들이닥칠 때 서로 연락해 피신할 수 있었다.

`숨은 꽃(은화)들의 고난에 찬, 그러나 신념과 용기로 충만한 신앙생활(김성태(요셉) 신부)'이 보여주듯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자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바쳐 쟁취한 기나긴 투쟁의 산물이다.

하여 데레사가 부서져라 꼭 쥔 성모패는 고난의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 신앙심이며, 더 이상 국가를 운영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자들의 폭정에 대한 저항이자, 하느님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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